국제신문에 난 '남명 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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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첨부 사진 : 합천군 삼가면 하판리 지동마을 남명 선산
(앞쪽부터 남명의 부친, 조부모, 증조부모 묘소)
우리는 남명의 서릿발 같은 벽립천인(壁立千仞)의 기상과, 그리고 대의(大義)를 위해 과단성 있게 행동한 남명 조식을 존경한다. 하지만 그동안 남명의 고향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 자신과 우리는 입으로만 남명 사상을 계승하자고 하고는 기회주의적 상황 논리로 처신한 것이 아닌지 자문해 본다. 아래 글은 오늘 난 국제신문 기사다.
신병주의 규장각 다시 읽기 <8> 남명집
서릿발 직언 쏟아낸 참선비 정신 담아, 영남학파 대표 문인 남명 조식 문집
사회 위기 의식 군주에게 바로 전달, 핵심 사상은 敬·義…수양 실천 강조
남명 조식 선생이 61세 때부터 72세로 별세할 때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장소인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산천재(産天齋).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은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을 이룬 인물이다. 평생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처사로 살아갔지만 현실의 모순에 대해서는 날카롭고 직선적인 언어로 자신의 의사를 개진한 실천하는 지성이었다. 그의 문집인 '남명집'을 통해 사화(士禍)의 시대를 살아간 참선비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남명집은 1604년 문인 정인홍 등에 의하여 초간본이 간행되었으며, 1622년 다시 정인홍이 중심이 되어 덕천서원에서 교정하여 5권 3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1764년(영조 40)에는 1622년 간행본을 바탕으로 박정신 등이 14권 8책으로 중간하였다.
영남학파 라이벌, 조식과 이황
경남 산청군 시천면 남명기념관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의 영정.
'평생 마음으로 사귀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질 못했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 머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결국 정신적 사귐으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요? …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자루질 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말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합니다. … 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습니까'('남명집', '퇴계에게 드리는 편지', 1564년)
위의 편지는 서두에서 남명이 퇴계와 한번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보였지만, 실제로 남명은 당시 퇴계와 고봉 기대승 등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던 성리학 이론논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퇴계에게 충고의 형태로 편지를 섰다.
이에 대해 퇴계는 별지(別紙)에서 '이 말이 흠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은 여기에 깊이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남명의 입장을 어느 정도 수용하였다.
대부분 퇴계와 가장 선명하게 비교되는 인물로 율곡 이이를 손꼽지만 실제 퇴계의 가장 큰 학문적 라이벌은 남명이었다. 남명(1501~1572)은 퇴계(1501~1570)와 동년인 1501년에 태어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인식되었다. 퇴계의 근거지 안동·예안은 경상좌도의 중심지, 남명의 근거지 합천·진주는 경상우도의 중심지였다. 낙동강을 경계로 '좌퇴계 우남명'으로 나뉜 것이다. 퇴계는 온화하고 포근한 청량산을 닮았고 남명은 우뚝 솟은 기상의 지리산을 닮아 갔다. 퇴계는 성리학의 이론을 깊이 심화시키면서 '동방의 주자'로 칭송받았고, 남명은 실천하는 지성인으로 그 이름을 깊이 새겨 놓았다.
조식 선생이 1555년 당시 사회의 위기의식을 날선 문장으로 과감하게 지적해 올린 상소문인 '을묘사직소'.
조정을 진동시킨 상소문
"전하의 나라 일이 이미 잘못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 버렸는데 회오리 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래됩니다. …자전(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후계자(孤嗣)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남명집' 권2, '을묘사직소')
1555년 단성현감을 제수받은 후에 올린 사직 상소문에서 조식은 당시 사회의 위기의식을 날선 문장으로 과감하게 지적하였다. 특히 실질적인 권력자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아로 표현한 부분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이에 파생되는 외척정치의 문제점을 직선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말 한마디로 목숨을 날릴 수 있는 절대군주 앞에서 일개 처사에 불과했던 조식은 이처럼 당당하게 직언을 퍼붓는 선비였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는 이유로 남명을 처벌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상당수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조식이 초야에 묻힌 선비여서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 그 우국충정은 높이 살 만하다'거나, '조식에게 죄를 주면 언로가 막힌다'는 논리로 적극 변호함으로써 파문은 가라앉을 수 있었다. 정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재야 선비와 그 발언을 존중한 시대분위기는 주목할 만하다.
칼을 찬 선비
남명은 무엇보다 학문에 있어서 수양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경(敬)과 의(義)는 바로 남명 사상의 핵심이다. 남명은 '경'을 통한 수양을 바탕으로, 외부의 모순에 대해 과감하게 실천하는 개념인 '의'를 신념화하였다.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항상 깨어있음)라는 방울을, 의의 상징으로는 칼을 찼으며, 칼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과감히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고 새겨 놓았다. 방울과 칼을 찬 선비 학자. 언뜻 연상되기 힘든 캐릭터이지만, 남명은 이러한 모습을 실천해 나갔다. 조정에 잘못이 있을 때마다 상소문을 통해 과감하게 문제점을 지적하고,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후학들에게는 강경한 대왜관을 심어 주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정인홍, 곽재우, 김면, 조종도 등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된 것도 그의 가르침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조식이 스스로에 엄격했음은 '욕천(浴川)'이라는 시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난다. '온 몸에 찌든 사십년의 찌꺼기를, 천 섬의 맑은 물로 다 씻어 없애리라. 그래도 흙먼지가 오장에 남았거든, 곧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라'는 표현은 유학자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과격하다. 그만큼 자신을 다잡는 강한 의지가 돋보인다. 조식의 사상에서 의(義)는 실천적 행동을 의미했다. 의는 그가 차고 다녔던 '칼'의 이미지와도 맥을 같이한다. 조식의 칼은 안으로는 자신에 대한 수양과 극기로, 밖으로는 외적에 대한 대처와 조정의 관료들에게 향해져 있었다. 칼로 상징되는 그의 이미지는 수양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극복해 가는 실천적인 선비 학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조식과 지리산
조식은 말년에 지리산 산천재에 거처를 잡았으며, 지리산의 웅혼한 기상을 닮고자 했다. '천석들이 종을 보게나…'로 시작하는 시와 1558년에 있었던 지리산 기행을 기록한 '유두류록(遊頭流錄)'에는 지리산을 무대로 한 조식의 삶이 잘 표현되어 있다. 조식은 61세가 되던 해에 외가인 합천을 떠나 지리산이 보이는 산천재에 마지막 학문의 터전을 잡았다. 여기서 '산천'이란 산속에 있는 하늘의 형상을 본받아 군자가 강건하고 독실하게 스스로를 빛냄으로써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지리산은 바로 조식이 가장 닮고 싶었던 바로 그 산이었다. 다음의 시에는 조식의 그러한 심정이 잘 담겨져 있다.
청컨대 무거운 종을 보게 (請看千石鐘)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네 (非大구無聲)
두류산과 꼭 닮아서 (爭似頭流山)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네 (天鳴猶不鳴)
지리산은 예로부터 삼신산(三神山)-삼신산은 중국의 '史記'에 나오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산. 즉 발해만 동쪽에 있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의 삼산인데, 여기에는 신선이 살고 있고, 불사약이 있다하여 진시황이 이것을 구하려고 동남동녀를 보냈다는 전설이 있다. 봉래산은 금강산, 방장산은 지리산, 영주산은 한라산을 가리킨다(민족문화사, '한국민속대사전' 참조)-의 하나로 민간의 의식세계에 깊이 자리를 잡아 왔으며 민중들에게 피안의 장을 제공하는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조선시대 도가적 성향을 지닌 지식인들을 기록한 홍만종의 '해동이적'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지리산을 중요한 정신적 배경으로 하고 있음이 보이며, 지리산의 지명에 보이는 삼신동 청학동의 명칭은 도가적 의식을 잘 보여준다. 지리산은 조선후기 이후에도 변혁 저항세력의 중심무대가 되었는데 조식의 문인들이 의병운동이나 정치에서 적극적이고 급진적인 측면을 보인 것에는 이러한 지리산이 가져다 준 정신적인 배경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조식은 생전에 10여 차례 이상 지리산을 유람했고 지리산을 노래한 시와 기행문을 남겼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도 지리산이 보이는 이곳 산천재에서 맞았다. 묘소도 다른 학자와는 달리 자신의 생가(주: 본가이기도 한 삼가)가 아닌 바로 이곳,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잡아두었다. 앞으로는 덕천강이 흘러가고 뒤로는 천왕봉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솟아있는 곳이다.
조식은 16세기 당대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식인이었다. 재야에 묻혀있으면서도 현실정치에 문제점이 노정될 때마다 직언을 서슴치 않았고, 경과 의를 실천하며 제자들에게도 그 가르침이 이어지게 한 선비 조식, 우뚝 솟은 지리산 천왕봉의 기상처럼 그는 진정한 선비란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준 인물이었다.
조식처럼 서릿발과 같은 비판과 직언을 쏟아내는 지식인, 그리고 그것을 수용해 주었던 조선의 젊은 선비들과 사관(史官), 이것이 16세기 조선사회를 이끌 수 있었던 하나의 힘은 아니었을까? 냉철한 지성과 함께 조식이 가슴속에 품어두었던 그 칼을 다시 빌려오고 싶은 시대이다.
신병주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국제신문 2006. 8. 28-
(앞쪽부터 남명의 부친, 조부모, 증조부모 묘소)
우리는 남명의 서릿발 같은 벽립천인(壁立千仞)의 기상과, 그리고 대의(大義)를 위해 과단성 있게 행동한 남명 조식을 존경한다. 하지만 그동안 남명의 고향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 자신과 우리는 입으로만 남명 사상을 계승하자고 하고는 기회주의적 상황 논리로 처신한 것이 아닌지 자문해 본다. 아래 글은 오늘 난 국제신문 기사다.
신병주의 규장각 다시 읽기 <8> 남명집
서릿발 직언 쏟아낸 참선비 정신 담아, 영남학파 대표 문인 남명 조식 문집
사회 위기 의식 군주에게 바로 전달, 핵심 사상은 敬·義…수양 실천 강조
남명 조식 선생이 61세 때부터 72세로 별세할 때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장소인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산천재(産天齋).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은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을 이룬 인물이다. 평생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처사로 살아갔지만 현실의 모순에 대해서는 날카롭고 직선적인 언어로 자신의 의사를 개진한 실천하는 지성이었다. 그의 문집인 '남명집'을 통해 사화(士禍)의 시대를 살아간 참선비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남명집은 1604년 문인 정인홍 등에 의하여 초간본이 간행되었으며, 1622년 다시 정인홍이 중심이 되어 덕천서원에서 교정하여 5권 3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1764년(영조 40)에는 1622년 간행본을 바탕으로 박정신 등이 14권 8책으로 중간하였다.
영남학파 라이벌, 조식과 이황
경남 산청군 시천면 남명기념관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의 영정.
'평생 마음으로 사귀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질 못했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 머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결국 정신적 사귐으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요? …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자루질 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말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합니다. … 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습니까'('남명집', '퇴계에게 드리는 편지', 1564년)
위의 편지는 서두에서 남명이 퇴계와 한번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보였지만, 실제로 남명은 당시 퇴계와 고봉 기대승 등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던 성리학 이론논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퇴계에게 충고의 형태로 편지를 섰다.
이에 대해 퇴계는 별지(別紙)에서 '이 말이 흠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은 여기에 깊이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남명의 입장을 어느 정도 수용하였다.
대부분 퇴계와 가장 선명하게 비교되는 인물로 율곡 이이를 손꼽지만 실제 퇴계의 가장 큰 학문적 라이벌은 남명이었다. 남명(1501~1572)은 퇴계(1501~1570)와 동년인 1501년에 태어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인식되었다. 퇴계의 근거지 안동·예안은 경상좌도의 중심지, 남명의 근거지 합천·진주는 경상우도의 중심지였다. 낙동강을 경계로 '좌퇴계 우남명'으로 나뉜 것이다. 퇴계는 온화하고 포근한 청량산을 닮았고 남명은 우뚝 솟은 기상의 지리산을 닮아 갔다. 퇴계는 성리학의 이론을 깊이 심화시키면서 '동방의 주자'로 칭송받았고, 남명은 실천하는 지성인으로 그 이름을 깊이 새겨 놓았다.
조식 선생이 1555년 당시 사회의 위기의식을 날선 문장으로 과감하게 지적해 올린 상소문인 '을묘사직소'.
조정을 진동시킨 상소문
"전하의 나라 일이 이미 잘못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 버렸는데 회오리 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래됩니다. …자전(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후계자(孤嗣)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남명집' 권2, '을묘사직소')
1555년 단성현감을 제수받은 후에 올린 사직 상소문에서 조식은 당시 사회의 위기의식을 날선 문장으로 과감하게 지적하였다. 특히 실질적인 권력자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아로 표현한 부분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이에 파생되는 외척정치의 문제점을 직선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말 한마디로 목숨을 날릴 수 있는 절대군주 앞에서 일개 처사에 불과했던 조식은 이처럼 당당하게 직언을 퍼붓는 선비였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는 이유로 남명을 처벌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상당수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조식이 초야에 묻힌 선비여서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 그 우국충정은 높이 살 만하다'거나, '조식에게 죄를 주면 언로가 막힌다'는 논리로 적극 변호함으로써 파문은 가라앉을 수 있었다. 정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재야 선비와 그 발언을 존중한 시대분위기는 주목할 만하다.
칼을 찬 선비
남명은 무엇보다 학문에 있어서 수양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경(敬)과 의(義)는 바로 남명 사상의 핵심이다. 남명은 '경'을 통한 수양을 바탕으로, 외부의 모순에 대해 과감하게 실천하는 개념인 '의'를 신념화하였다.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항상 깨어있음)라는 방울을, 의의 상징으로는 칼을 찼으며, 칼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과감히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고 새겨 놓았다. 방울과 칼을 찬 선비 학자. 언뜻 연상되기 힘든 캐릭터이지만, 남명은 이러한 모습을 실천해 나갔다. 조정에 잘못이 있을 때마다 상소문을 통해 과감하게 문제점을 지적하고,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후학들에게는 강경한 대왜관을 심어 주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정인홍, 곽재우, 김면, 조종도 등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된 것도 그의 가르침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조식이 스스로에 엄격했음은 '욕천(浴川)'이라는 시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난다. '온 몸에 찌든 사십년의 찌꺼기를, 천 섬의 맑은 물로 다 씻어 없애리라. 그래도 흙먼지가 오장에 남았거든, 곧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라'는 표현은 유학자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과격하다. 그만큼 자신을 다잡는 강한 의지가 돋보인다. 조식의 사상에서 의(義)는 실천적 행동을 의미했다. 의는 그가 차고 다녔던 '칼'의 이미지와도 맥을 같이한다. 조식의 칼은 안으로는 자신에 대한 수양과 극기로, 밖으로는 외적에 대한 대처와 조정의 관료들에게 향해져 있었다. 칼로 상징되는 그의 이미지는 수양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극복해 가는 실천적인 선비 학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조식과 지리산
조식은 말년에 지리산 산천재에 거처를 잡았으며, 지리산의 웅혼한 기상을 닮고자 했다. '천석들이 종을 보게나…'로 시작하는 시와 1558년에 있었던 지리산 기행을 기록한 '유두류록(遊頭流錄)'에는 지리산을 무대로 한 조식의 삶이 잘 표현되어 있다. 조식은 61세가 되던 해에 외가인 합천을 떠나 지리산이 보이는 산천재에 마지막 학문의 터전을 잡았다. 여기서 '산천'이란 산속에 있는 하늘의 형상을 본받아 군자가 강건하고 독실하게 스스로를 빛냄으로써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지리산은 바로 조식이 가장 닮고 싶었던 바로 그 산이었다. 다음의 시에는 조식의 그러한 심정이 잘 담겨져 있다.
청컨대 무거운 종을 보게 (請看千石鐘)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네 (非大구無聲)
두류산과 꼭 닮아서 (爭似頭流山)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네 (天鳴猶不鳴)
지리산은 예로부터 삼신산(三神山)-삼신산은 중국의 '史記'에 나오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산. 즉 발해만 동쪽에 있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의 삼산인데, 여기에는 신선이 살고 있고, 불사약이 있다하여 진시황이 이것을 구하려고 동남동녀를 보냈다는 전설이 있다. 봉래산은 금강산, 방장산은 지리산, 영주산은 한라산을 가리킨다(민족문화사, '한국민속대사전' 참조)-의 하나로 민간의 의식세계에 깊이 자리를 잡아 왔으며 민중들에게 피안의 장을 제공하는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조선시대 도가적 성향을 지닌 지식인들을 기록한 홍만종의 '해동이적'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지리산을 중요한 정신적 배경으로 하고 있음이 보이며, 지리산의 지명에 보이는 삼신동 청학동의 명칭은 도가적 의식을 잘 보여준다. 지리산은 조선후기 이후에도 변혁 저항세력의 중심무대가 되었는데 조식의 문인들이 의병운동이나 정치에서 적극적이고 급진적인 측면을 보인 것에는 이러한 지리산이 가져다 준 정신적인 배경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조식은 생전에 10여 차례 이상 지리산을 유람했고 지리산을 노래한 시와 기행문을 남겼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도 지리산이 보이는 이곳 산천재에서 맞았다. 묘소도 다른 학자와는 달리 자신의 생가(주: 본가이기도 한 삼가)가 아닌 바로 이곳,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잡아두었다. 앞으로는 덕천강이 흘러가고 뒤로는 천왕봉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솟아있는 곳이다.
조식은 16세기 당대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식인이었다. 재야에 묻혀있으면서도 현실정치에 문제점이 노정될 때마다 직언을 서슴치 않았고, 경과 의를 실천하며 제자들에게도 그 가르침이 이어지게 한 선비 조식, 우뚝 솟은 지리산 천왕봉의 기상처럼 그는 진정한 선비란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준 인물이었다.
조식처럼 서릿발과 같은 비판과 직언을 쏟아내는 지식인, 그리고 그것을 수용해 주었던 조선의 젊은 선비들과 사관(史官), 이것이 16세기 조선사회를 이끌 수 있었던 하나의 힘은 아니었을까? 냉철한 지성과 함께 조식이 가슴속에 품어두었던 그 칼을 다시 빌려오고 싶은 시대이다.
신병주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국제신문 2006.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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