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문인 3. 성팽년(成彭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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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성팽년(成彭年, 1540∼1594)의 자는 이옹(翁)이고 호는 석곡(石谷)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안음(安陰)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0년(중종 35년) 정월 17일에 교위 한량(漢良)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석곡집(石谷集)』 1책이 전한다.
그는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의약(議約), 복서(卜筮), 산경(山經), 지지(地誌) 등 유학 이외의 분야도 두루 섭렵하였다.
과거 및 벼슬 : 성팽년은 1564년(명종 19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있다가 1589년(선조 22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학업을 그만두고 오직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의병활동 : 그는 1592년(선조 25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김면(金沔)이 고령, 거창, 현풍 등 경상도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정유명(鄭惟明) 등과 함께 안음에서 기병유사(起兵有司)로 창의문(倡義文)을 발통하는 등 김면의 참모가 되어 의병활동을 하였다.
향사 : 성팽년은 1594년(선조 27년)에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안의(安義)의 구연서원(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 참고자료
成彭年, 『石谷集』 1책.
『松菴遺稿』.
郭敬烈, 「壬辰嶺南忠義錄」, 『壬辰嶺南義兵史』, 壬亂護國嶺南忠義壇保存會, 2001. 4.
성팽년(成彭年, 1540∼1594)의 자는 이옹(翁)이고 호는 석곡(石谷)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안음(安陰)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0년(중종 35년) 정월 17일에 교위 한량(漢良)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석곡집(石谷集)』 1책이 전한다.
그는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의약(議約), 복서(卜筮), 산경(山經), 지지(地誌) 등 유학 이외의 분야도 두루 섭렵하였다.
과거 및 벼슬 : 성팽년은 1564년(명종 19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있다가 1589년(선조 22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학업을 그만두고 오직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의병활동 : 그는 1592년(선조 25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김면(金沔)이 고령, 거창, 현풍 등 경상도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정유명(鄭惟明) 등과 함께 안음에서 기병유사(起兵有司)로 창의문(倡義文)을 발통하는 등 김면의 참모가 되어 의병활동을 하였다.
향사 : 성팽년은 1594년(선조 27년)에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안의(安義)의 구연서원(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 참고자료
成彭年, 『石谷集』 1책.
『松菴遺稿』.
郭敬烈, 「壬辰嶺南忠義錄」, 『壬辰嶺南義兵史』, 壬亂護國嶺南忠義壇保存會, 200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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