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문인 8. 이칭(李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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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이칭(李偁, 1535~1600)의 자는 여선(汝宣)이고 호는 황곡(篁谷)이며,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그는 1535년(중종 30년) 2월 17일에 태어나 함안(咸安)에 거주하였으며 그가 남긴 문집은 『황곡집(篁谷集)』 3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이칭은 10여세에 이미 경전(經傳)에 통달하였는데, 외숙인 갈천(葛川)선생이 일르기를, “너는 동자인데 이렇게 배우기를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으니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냐?”라고 하자, “성인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슴니까? 어려서는 배우고 자라서는 그것을 실행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외물에 마음을 두고 않고 스스로를 성실하게 다스리고 독실하게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다.
1553년(명종 8년)에 부친상을 당하지 3년간 여막살이를 하며 묘를 지켰다. 또한 성리의 책을 가져다 아침 저녁으로 강습하였다.
살고 있는 집 곁에다 띠집 여러 칸을 지어 황곡유거(篁谷幽居)라는 편액을 달고 날마다 거기서 책을 읽었다.
임진왜란 이후 주현의 학교제도와 사대부가의 관혼상제의 법도가 거의 인멸되어 효험이 없어지니 여러 고을의 선비들이 모두 와서 이칭에게 나아와 바로 잡았다. 경서를 들고와 학업에 진전이 있기를 청하는 사람들 또한 매우 많았는데 그는 그들과 강설하기를 정성스럽게하여 그치지 않았다.
급문 : 일찍이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노닐며 군자가 몸을 세우고 자신을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강학 및 교유 : 그는 김우옹(金宇顒),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 등과 함께 도의로 교분을 맺고 학문을 연마하며 서로 의지하였다.
의병활동 : 1592년(선조 25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은 왜적의 통로가 되었다. 처음에 그는 이정(李瀞)과 더불어 자굴산으로 들어가 왜적을 피했다. 얼마 있다가 김면과 곽재우가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친다는 소문을 듣고 이정(李瀞)과 함께 의춘(宜春)에서 강을 건너니 박제인이 소문을 듣고 와서 만나 함께 의병을 일으켜 병사를 모집하였다. 이때 김성일이 초유사로 있었는데 조종도가 막하에 있으면서 또한 와서 만나고는 왜적을 치는데 정성을 다하자고 마음으로 맹서하고 사졸들을 불러 모았는데, 오십여 명이 다투어 모여 들었다.
초유사의 막하에 유숭인(柳崇仁)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칭을 만나보고는 병사가 많으니 힘을 빌어 쓰고 싶다고 하자 이칭은 “다같이 나라의 일인데 어찌 이것 저것 따지겠소?”하며 즉시 병사를 그에게 주었다. 이때 나라에서는 어려움이 많아 안팎으로 유랑하고 있어 선조임금은 나라를 바로 세워 구할 계책을 도모하였고 널리 재주와 덕을 겸비한 선비를 구했다.
1597년(선조 30년) 가을에 왜구들이 또 호남의 길을 따라 현읍(縣邑)을 살육하고 불지르며 유민들을 죽이고 노략질하니 이칭이 어리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데리고 숨었는데 방백과 수재(守宰)들이 가는 곳마다 잘 보호해 주어서 내외 친척들이 위급한 환난을 면할 수 있었다.
이칭은 1600년(선조 33년) 12월 16일 병으로 검암정사(儉巖精舍)에서 66세의 일기를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이미 입관을 마친 후에 은진현감에 제수한다는 교지가 내려졌다.
□ 참고자료
李 偁, 『篁谷集』 3권 1책.
이칭(李偁, 1535~1600)의 자는 여선(汝宣)이고 호는 황곡(篁谷)이며,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그는 1535년(중종 30년) 2월 17일에 태어나 함안(咸安)에 거주하였으며 그가 남긴 문집은 『황곡집(篁谷集)』 3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이칭은 10여세에 이미 경전(經傳)에 통달하였는데, 외숙인 갈천(葛川)선생이 일르기를, “너는 동자인데 이렇게 배우기를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으니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냐?”라고 하자, “성인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슴니까? 어려서는 배우고 자라서는 그것을 실행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외물에 마음을 두고 않고 스스로를 성실하게 다스리고 독실하게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다.
1553년(명종 8년)에 부친상을 당하지 3년간 여막살이를 하며 묘를 지켰다. 또한 성리의 책을 가져다 아침 저녁으로 강습하였다.
살고 있는 집 곁에다 띠집 여러 칸을 지어 황곡유거(篁谷幽居)라는 편액을 달고 날마다 거기서 책을 읽었다.
임진왜란 이후 주현의 학교제도와 사대부가의 관혼상제의 법도가 거의 인멸되어 효험이 없어지니 여러 고을의 선비들이 모두 와서 이칭에게 나아와 바로 잡았다. 경서를 들고와 학업에 진전이 있기를 청하는 사람들 또한 매우 많았는데 그는 그들과 강설하기를 정성스럽게하여 그치지 않았다.
급문 : 일찍이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노닐며 군자가 몸을 세우고 자신을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강학 및 교유 : 그는 김우옹(金宇顒),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 등과 함께 도의로 교분을 맺고 학문을 연마하며 서로 의지하였다.
의병활동 : 1592년(선조 25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은 왜적의 통로가 되었다. 처음에 그는 이정(李瀞)과 더불어 자굴산으로 들어가 왜적을 피했다. 얼마 있다가 김면과 곽재우가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친다는 소문을 듣고 이정(李瀞)과 함께 의춘(宜春)에서 강을 건너니 박제인이 소문을 듣고 와서 만나 함께 의병을 일으켜 병사를 모집하였다. 이때 김성일이 초유사로 있었는데 조종도가 막하에 있으면서 또한 와서 만나고는 왜적을 치는데 정성을 다하자고 마음으로 맹서하고 사졸들을 불러 모았는데, 오십여 명이 다투어 모여 들었다.
초유사의 막하에 유숭인(柳崇仁)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칭을 만나보고는 병사가 많으니 힘을 빌어 쓰고 싶다고 하자 이칭은 “다같이 나라의 일인데 어찌 이것 저것 따지겠소?”하며 즉시 병사를 그에게 주었다. 이때 나라에서는 어려움이 많아 안팎으로 유랑하고 있어 선조임금은 나라를 바로 세워 구할 계책을 도모하였고 널리 재주와 덕을 겸비한 선비를 구했다.
1597년(선조 30년) 가을에 왜구들이 또 호남의 길을 따라 현읍(縣邑)을 살육하고 불지르며 유민들을 죽이고 노략질하니 이칭이 어리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데리고 숨었는데 방백과 수재(守宰)들이 가는 곳마다 잘 보호해 주어서 내외 친척들이 위급한 환난을 면할 수 있었다.
이칭은 1600년(선조 33년) 12월 16일 병으로 검암정사(儉巖精舍)에서 66세의 일기를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이미 입관을 마친 후에 은진현감에 제수한다는 교지가 내려졌다.
□ 참고자료
李 偁, 『篁谷集』 3권 1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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