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5. 김우굉(金宇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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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김우굉(金宇宏, 1524∼1590)의 자는 경부(敬夫)이고 호는 개암(開巖)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성주(星州)에 거주하였다가 후에 상주(尙州)로 옮겼다. 그는 1524년(중종 19년)에 부사(府事)를 지낸 칠봉(七峰) 김희삼(金希參)의 아들로 태어났고 김우옹의 형인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개암집(開巖集)』 4권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김우굉은 자품이 넓고 남다를 뿐만 아니라 문장이 크고 넉넉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시·예에 관한 교육을 받았고 성장해서는 또 뇌계와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왕래하여 대인군자의 가르침을 받았다.
급문 : 김우굉은 초년에 아우 김우옹과 함께 부친의 명으로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후에 퇴계선생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그의 행장에 의하면,
일찍이 퇴도(退陶)와 남명(南冥)의 문(門)에 놀았고, 또 어진 아우가 있어 서로 절차(切磋)하여 문장이 일세의 사표(師表)가 되었다(『嶺南人物考』).
고 하며, 남명선생의 만시(挽詩)를 짓기도 하였다.
과거 및 벼슬 : 김우굉은 28세(1551년)에는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뽑혔고, 29세(1552년)에는 식년 진사에 제1등으로 합격하였다(『司馬榜目』).
42세(1565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들어가면서부터 환로(宦路)에 나섰으며, 43세(1566년)에는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서기 전인 1565년(명종 20년) 8월 5일에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승려로 정사(政事)에 참여하고 있던 요승 보우(普雨)를 축출하도록 앞장서서 상소(『명종실록』 20년)를 하기도 했던 김우굉은 경연에 나아가 강(講)할 때나 사간원에서 재임 중일 때 임금에게 여러 차례 직간을 하여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있던 아우 김우옹이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유배된 관계로, 그 영향을 받아 외직으로 밀려나기도 하였다.
김우굉은 48세(1571년)에 전적으로 승진하였고, 곧 예조와 병조좌랑 겸 지제교로 옮겼다. 49세(1572년)에는 정언(正言)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헌납(獻納)과 사간(司諫) 등의 직으로 옮겼다.
50세(1573년)에는 홍문관 부수찬으로 뽑히어 제수되었고, 53세(1576년) 봄에는 교리에 임명되었다. 54세(1577년)에는 집의(執義)에서 의정부 검상사인(檢詳舍人)으로 옮겨 제수되었다가 또 응교(應敎)로 옮겼다. 55세(1578년)에는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동부승지, 대사간, 대사성 등을 지냈다. 56세(1579년)에는 병조참의, 승지에 이르렀으나 이수(李銖)의 옥사로 곧 파직되었다. 57세(1580년)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조참의, 장예원 판결사, 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58세(1581년)에는 유생 박제(朴濟)로부터 음흉하다는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청송부사, 광주목사 등을 지냈다.
60세 때(1583년)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부임하였을 때에는 이이(李珥)와 사이가 나빠 서인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 성주로 돌아왔고, 64세(1587년) 여름에는 성절사(聖節使)로 가게 되었으나 임금이 그의 노병(老病)을 걱정하여 교체하도록 명하였고, 가을에 광주목사로 임명되고 66세(1589년) 봄에 질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이해에는 동생 김우옹이 정여립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그는 영천으로 달려가서 동생을 만나 갓과 옷을 벗어주고 시 한 수를 지어주며 이별하였다.
강학 및 교유 : 김우굉은 개암(開巖)이라는 곳을 좋아하였다. 이곳은 산수가 아름다워 그가 오고 가면서 놀고 감상하던 곳이었다. 후학들이 이로 인하여 그를 개암선생이라고 불렀다.(「행장」).
그는 43세(1566년) 5월 13일에 강익, 노관(盧), 양홍택(梁弘澤), 김우옹 등과 더불어 함양에 있는 남계서원에 모여 대화하였고, 연이어 함안의 서계(西溪)를 유람하였다.(「행장」 및 『梅村實紀』).
그는 아우 김우옹과는 형제간으로 함께 박문약례(博文約禮)하고 덕을 닦고 학문을 배웠으며, 경전과 정주학에 관한 여러 서적에 관해서는 반드시 그 정수를 철저히 알고 그 진실을 힘써 실천하려고 하였다.
63세(1586년)에는 유성룡이 물러나 한거(閑居)하고 있다가 가을에 강굽이에서 배를 타고 내려와서 이틀을 자고 갔는데, 더불어 논한 내용은 모두 학문을 하는 큰 요점과 세상을 바로 잡는 원대한 계획이어서 시론(時論)을 걱정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향사 : 김우굉은 67세(1590년)에 우거지 상주(尙州)에서 세상을 떠난 후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 참고자료
『明宗實錄』 7년, 20년, 22년.
『宣祖實錄』 6년∼8년, 14년, 16년, 22년.
『宣祖修正實錄』 12년, 14년, 16년, 22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1·4·12.
金宇宏, 『開巖集』 4권 1책.
『燃藜室記述』.
『石潭日記』.
김우굉(金宇宏, 1524∼1590)의 자는 경부(敬夫)이고 호는 개암(開巖)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성주(星州)에 거주하였다가 후에 상주(尙州)로 옮겼다. 그는 1524년(중종 19년)에 부사(府事)를 지낸 칠봉(七峰) 김희삼(金希參)의 아들로 태어났고 김우옹의 형인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개암집(開巖集)』 4권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김우굉은 자품이 넓고 남다를 뿐만 아니라 문장이 크고 넉넉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시·예에 관한 교육을 받았고 성장해서는 또 뇌계와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왕래하여 대인군자의 가르침을 받았다.
급문 : 김우굉은 초년에 아우 김우옹과 함께 부친의 명으로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후에 퇴계선생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그의 행장에 의하면,
일찍이 퇴도(退陶)와 남명(南冥)의 문(門)에 놀았고, 또 어진 아우가 있어 서로 절차(切磋)하여 문장이 일세의 사표(師表)가 되었다(『嶺南人物考』).
고 하며, 남명선생의 만시(挽詩)를 짓기도 하였다.
과거 및 벼슬 : 김우굉은 28세(1551년)에는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뽑혔고, 29세(1552년)에는 식년 진사에 제1등으로 합격하였다(『司馬榜目』).
42세(1565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들어가면서부터 환로(宦路)에 나섰으며, 43세(1566년)에는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서기 전인 1565년(명종 20년) 8월 5일에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승려로 정사(政事)에 참여하고 있던 요승 보우(普雨)를 축출하도록 앞장서서 상소(『명종실록』 20년)를 하기도 했던 김우굉은 경연에 나아가 강(講)할 때나 사간원에서 재임 중일 때 임금에게 여러 차례 직간을 하여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있던 아우 김우옹이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유배된 관계로, 그 영향을 받아 외직으로 밀려나기도 하였다.
김우굉은 48세(1571년)에 전적으로 승진하였고, 곧 예조와 병조좌랑 겸 지제교로 옮겼다. 49세(1572년)에는 정언(正言)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헌납(獻納)과 사간(司諫) 등의 직으로 옮겼다.
50세(1573년)에는 홍문관 부수찬으로 뽑히어 제수되었고, 53세(1576년) 봄에는 교리에 임명되었다. 54세(1577년)에는 집의(執義)에서 의정부 검상사인(檢詳舍人)으로 옮겨 제수되었다가 또 응교(應敎)로 옮겼다. 55세(1578년)에는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동부승지, 대사간, 대사성 등을 지냈다. 56세(1579년)에는 병조참의, 승지에 이르렀으나 이수(李銖)의 옥사로 곧 파직되었다. 57세(1580년)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조참의, 장예원 판결사, 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58세(1581년)에는 유생 박제(朴濟)로부터 음흉하다는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청송부사, 광주목사 등을 지냈다.
60세 때(1583년)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부임하였을 때에는 이이(李珥)와 사이가 나빠 서인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 성주로 돌아왔고, 64세(1587년) 여름에는 성절사(聖節使)로 가게 되었으나 임금이 그의 노병(老病)을 걱정하여 교체하도록 명하였고, 가을에 광주목사로 임명되고 66세(1589년) 봄에 질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이해에는 동생 김우옹이 정여립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그는 영천으로 달려가서 동생을 만나 갓과 옷을 벗어주고 시 한 수를 지어주며 이별하였다.
강학 및 교유 : 김우굉은 개암(開巖)이라는 곳을 좋아하였다. 이곳은 산수가 아름다워 그가 오고 가면서 놀고 감상하던 곳이었다. 후학들이 이로 인하여 그를 개암선생이라고 불렀다.(「행장」).
그는 43세(1566년) 5월 13일에 강익, 노관(盧), 양홍택(梁弘澤), 김우옹 등과 더불어 함양에 있는 남계서원에 모여 대화하였고, 연이어 함안의 서계(西溪)를 유람하였다.(「행장」 및 『梅村實紀』).
그는 아우 김우옹과는 형제간으로 함께 박문약례(博文約禮)하고 덕을 닦고 학문을 배웠으며, 경전과 정주학에 관한 여러 서적에 관해서는 반드시 그 정수를 철저히 알고 그 진실을 힘써 실천하려고 하였다.
63세(1586년)에는 유성룡이 물러나 한거(閑居)하고 있다가 가을에 강굽이에서 배를 타고 내려와서 이틀을 자고 갔는데, 더불어 논한 내용은 모두 학문을 하는 큰 요점과 세상을 바로 잡는 원대한 계획이어서 시론(時論)을 걱정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향사 : 김우굉은 67세(1590년)에 우거지 상주(尙州)에서 세상을 떠난 후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 참고자료
『明宗實錄』 7년, 20년, 22년.
『宣祖實錄』 6년∼8년, 14년, 16년, 22년.
『宣祖修正實錄』 12년, 14년, 16년, 22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1·4·12.
金宇宏, 『開巖集』 4권 1책.
『燃藜室記述』.
『石潭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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