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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8. 임운(林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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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249회 작성일 03-10-2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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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임운(林芸, 1517∼1572)의 자는 언성(彦成)이고 호는 첨모당(瞻慕堂)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안의(安義)에 거주하였다. 그는 1517년(정축) 12월 12일에 거창 갈계리에서 진사(進士) 석천공 득번(石泉公 得蕃)과 진양 강씨 사이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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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문집은 『첨모당집(瞻慕堂集)』 3권 2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임운은 어린 시절 호탕하고 용맹한 성격으로 글 읽는 일보다 말 타고 활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이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무술을 권하고, 진사공도 병서를 가르치니 비로소 문리를 터득하였다고 한다. 병서를 통해 문리를 터득한 임운은 『맹자』를 비롯한 유학에 관한 책들을 열심히 읽어 유학자가 갖추어야 할 소양을 다 갖추게 되었다. 이로부터 학문에 전심하여 독서를 하고는 반드시 궁구해서 그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천성이 검소하여 입는 옷과 먹는 음식에 편안함과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이는 옛 성인의 것군자는 먹되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하되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한다겄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학문 정진하기에도 바쁜데 먹고 입는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대 뛰어난 선비들과 어울려 산수를 유람하며 학문 정진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임운은 책에 있어서는 읽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사서(四書), 『근사록』, 『심경』, 『주자서』 등에 관해 깊이 탐구하였고, 특히 역(易)에 관해서는 더욱 정력을 기울였다. 그외 천문, 지리, 의약, 복서(卜筮)의 법에 관해서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산수학과 병가서에는 더욱 유의하였으니, 스스로 정하고 스스로 맡아서 중점을 둔 분야가 많았던 것이다.

일찍이 맏형 임훈과 『주역』을 공부하였는데, 이 때 임훈이 이르기를 것사색하고 공부하는 데는 비록 옛날 덕있는 사람이라도 아우를 당하지 못할 것겄이라고 평하였다. 또한 것만약 내 아우로 하여금 뜻을 펴서 어떤 일을 하게 하였다면 천하의 어떠한 일도 담당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고, 옛날 덕있는 사람들이 힘써 했던 일도 쉽게 할 수 있었을 것겄이라고 하여 아우의 뛰어난 역량을 칭찬하였다.

그는 경(敬)을 학문의 요체로 여겨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경 공부는 안으로 마음 수양 쪽에 필요한 것으로서 예로부터 학자들이 수양의 기본으로 생각하는 덕목이었다. 그는 경을 단순히 수양을 하는 덕목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평생 동안 부모에게 효도하여 그 명성이 온 나라에 드러나 조정에서 생정려까지 내렸다.

벼슬 :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고향을 떠나 벼슬길에 올랐으나 참봉이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는 관직은 아니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신하된 도리와 맏형의 간곡한 권유로 벼슬살이를 계속하였다.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임훈의 아우 임운은 겁효성과 우애가 도타와서 평상시의 정성스러운 봉양과 슬프게 집상한 일이 훈과 다름이 없었다(『明宗實錄』 19년)겂고 한다.

1564년(명종 19년)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집경전(集慶殿), 연은전(延恩殿), 후릉(厚陵) 등의 참봉에 임명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려 5차례나 직을 옮겨,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하였다. 특히, 집경전 참봉 때는 전각이 기울어진 것을 알고 부윤에게 부탁하여 고치도록 하였다.

강학 및 교유 : 임운은 일찍이 맏형 임훈(林薰)을 모시고 남명선생, 노진, 오건 등의 명유들과 어울려 성정(性情)을 음영하고 고금의 일을 담론하면서 자연을 완상하기도 하였다.

행실 : 임운은 부모가 돌아가시기까지 곁에서 모시면서 효를 다하였고, 맏형 임훈이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 그는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면서 맏형이 집안 걱정을 하지 않고 오로지 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늙으신 부친을 봉양할 때 것먹이 물고 돌아오니 산은 저물고자 하네겄라는 시구를 지어 자식으로서 부모 은혜를 다 갚지 못할 것을 항상 걱정하였으며, 부친이 돌아가시자 묘소 옆에다 여막을 짓고 거처하면서 상복을 벗지 않고 조석으로 제물을 손수 장만하면서 몸이 불편하여도 묘소 곁을 떠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향사 : 임운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아들들을 불러 놓고 것너희들은 삼가서 나쁜 일을 하지 마라. 자고로 선한 일을 하여 이롭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악한 일을 하여 해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겄고 하는 경계의 말을 남기고 1572년(선조 5년)에 56세의 일기를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실록에 의하면, 1634년(인조 12년) 3월 16일에 신경직(愼景稷) 등이 경상도 안음에 있는 정여창의 서원에 사액할 것을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선정신(先正臣) 정여창(鄭汝昌)이 후학(後學)을 계발하고 오도(吾道)를 부호한 공에 대해서는 신들의 몇 마디 말을 들어볼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창이 홍치(弘治) 갑인년에 본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였는데, 5년 동안 재임하면서 인정(仁政)을 베풀고 문교(文敎)를 일으킨 것은 예사 수령들에게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난날에 비석과 사당을 세우고 용문서원(龍門書院)이라 호칭하였는데, 그가 고을에 있을 때 소요하던 곳입니다. 그리고 고을 사람인 임훈(林薰)·임운(林芸) 형제는 여창의 학문을 사숙(私淑)한 자들로서 산림(山林)에서 수양을 쌓으며 성현을 흠모하였는데, 이들은 모두가 일국의 선사(善士)였으므로 이들을 배향하였습니다. 함양(咸陽)은 바로 정여창이 살던 고을이었는데, 그 곳 남계서원(藍溪書院)은 이미 사액(賜額)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교화를 받은 신들의 고을이 여창에 대한 감회가 어찌 그곳과 다를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액호를 내리시어 문교를 빛나게 해주소서(『仁祖實錄』 12년).





□ 참고자료



『明宗實錄』 19년, 21년.

『宣祖實錄』 31년.

『仁祖實錄』 12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林 芸, 『瞻慕堂集』(『韓國文集叢刊』 36), 民族文化推進會, 1990.

『民族文化大百科辭典』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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