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9. 배신(裵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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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배신(裵紳, 1520∼1573)의 자는 경여(景餘)이고, 호는 낙천(洛川)이며, 본관은 성주(星州)로 현풍(玄風)에 거주하였다. 그는 낙상(洛上)에 살았으므로 와서 배우는 이들이 낙천선생(洛川先生)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1520년(광해군 12년)에 아버지 참봉 사종(嗣宗)과 어머니 밀양 박씨 동선(東善)의 딸 사이에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자료는 『낙천집(洛川集)』 2권 2책이 전한다.
급문 : 배신은 약관의 나이에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뒤에 퇴계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옛 사람의 학문하는 요지(要旨)를 『어 들었다. 학문에 이미 통하자 태학(太學)에 유학하여 김범(金範), 이제신(陶丘)과 더불어 제생이 서치(序齒)의 예를 강하였다(「행장」).
배신은 남명선생에게 급문하여 질의한 것이 많았는데, 남명선생과 엄자릉의 도(道)에 대해 묻기도 하였다. 남명선생은 그에게는 나아가 벼슬할 것을 권하였고, 오건에게는 물러나기를 권하기도 하였다(『南冥別集』, 卷5, 「師友錄」, 裵敎官言行略).
수학 및 교육 : 배신은 7세(1526년)에 같은 고을에 사는 김렬(金)에게 배우고 8세에는 엄한경(嚴漢卿)에게 배워서 학문이 날마다 진보하니 기재(奇才)라고 일컬었다. 53세(1572년)에는 동몽교관이 되어 학도들을 가르쳤다. 당시 그에게 종학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강소(講所)에 모두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배신은 자품이 탁이하여 어려서부터 도(道)를 강구할 뜻을 가져서 항상 말하기를, 겁학문하는 방법은 이치를 연구하여 실천하는데 벗어나지 아니한다겂고 하였다. 또한 그 집의 편액(扁額)을 경재(景齋)라고 하여 매양 책을 대하여 날을 마치며 성현의 종지를 걸어두고 스스로 힘썼다.
집에 있을 때의 일은 안팎이 예(禮)가 있었고, 형제가 화순하여 부모를 섬기고 어진이를 친하는 데에 돈독하였다. 벗은 충성으로 사귀고 말은 믿음으로 하며 행동은 공경으로 하여 작은 것이라고 하여 소홀히 하지 않았다. 또한 남이 보지 않는 곳이라고 하여 방자히 하지 않았으며, 배우는 이에게는 항상 편하고 방자하게 되어 물욕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또 말하기를 겁배우는 사람은 매양 부지런하고 괴로운 가운데 모름지기 무한한 의미가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행장」)겂이라고 하였다.
과거 및 벼슬 : 배신은 42세(1561년)에 식년 진사 제2등으로 합격하였고(『司馬榜目』), 46세(1565년)에는 관천(館薦)으로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고, 경기전참봉, 빙고별좌를 지냈다.
강학 및 교유 : 배신은 11세(1530년)에 이제신(陶丘), 김범, 김희년(金禧年), 여응구 등과 더불어 벗을 삼아 친하게 지냈고(『陶丘實紀』), 40세(1559년)에는 당시 남명선생의 문인인 곽율, 정구(鄭逑), 김우옹 등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었다(『禮谷集』). 44세(1563년)에는 김우옹, 정구(鄭逑), 박성, 노흠, 김면, 배신, 이기춘 등과 더불어 도의로 교유하였다(『濯溪集』; 『月窩逸稿』).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1632년(인조 10년) 10월 13일에 고령(高靈)에 사는 전 참봉 이현룡(李見龍) 등이 상소하여, 배신을 포상하고 이름을 기록하여 선비를 숭상하는 도를 중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해 예조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배신의 학문과 덕행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선배들이 있긴 합니다마는, 그가 죽은 지가 오래되어 그의 학행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그를 사모하는 문하생과 후학들이 대궐 앞으로 나와 상소를 올려 조정에서 포상의 은전을 내려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이 선사(先師)를 위해 세상에 드러내려고 한 정성은 가상합니다마는 포상할 만한 근거가 없고 또 그가 후세에 남긴 글도 없어서 그가 실천한 행적을 상고하여 확인하기가 어려우니, 그에게 특별한 은전을 추증하기란 경솔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잠시 중외(中外)의 공론이 하나로 모아지기를 기다렸다가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仁祖實錄』 11년).
저술 : 배신은 「남명선생실기」와 「송계행장(松溪行狀)」을 남겼다.
향사 : 배신은 54세(1573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현풍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노수신(盧守愼), 허엽(許曄) 등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해 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봉향되었다.
□ 참고자료
『明宗實錄』 20년.
『宣祖修正實錄』 4년.
『仁祖實錄』 11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裵 紳, 『洛川集』 2권 2책.
李濟臣, 『陶丘實紀』 3권 1책.
郭 율, 『禮谷集』.
全致遠, 『濯溪集』 5권 1책.
陳克元, 『月窩逸稿』 2권 1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5·9.
배신(裵紳, 1520∼1573)의 자는 경여(景餘)이고, 호는 낙천(洛川)이며, 본관은 성주(星州)로 현풍(玄風)에 거주하였다. 그는 낙상(洛上)에 살았으므로 와서 배우는 이들이 낙천선생(洛川先生)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1520년(광해군 12년)에 아버지 참봉 사종(嗣宗)과 어머니 밀양 박씨 동선(東善)의 딸 사이에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자료는 『낙천집(洛川集)』 2권 2책이 전한다.
급문 : 배신은 약관의 나이에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뒤에 퇴계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옛 사람의 학문하는 요지(要旨)를 『어 들었다. 학문에 이미 통하자 태학(太學)에 유학하여 김범(金範), 이제신(陶丘)과 더불어 제생이 서치(序齒)의 예를 강하였다(「행장」).
배신은 남명선생에게 급문하여 질의한 것이 많았는데, 남명선생과 엄자릉의 도(道)에 대해 묻기도 하였다. 남명선생은 그에게는 나아가 벼슬할 것을 권하였고, 오건에게는 물러나기를 권하기도 하였다(『南冥別集』, 卷5, 「師友錄」, 裵敎官言行略).
수학 및 교육 : 배신은 7세(1526년)에 같은 고을에 사는 김렬(金)에게 배우고 8세에는 엄한경(嚴漢卿)에게 배워서 학문이 날마다 진보하니 기재(奇才)라고 일컬었다. 53세(1572년)에는 동몽교관이 되어 학도들을 가르쳤다. 당시 그에게 종학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강소(講所)에 모두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배신은 자품이 탁이하여 어려서부터 도(道)를 강구할 뜻을 가져서 항상 말하기를, 겁학문하는 방법은 이치를 연구하여 실천하는데 벗어나지 아니한다겂고 하였다. 또한 그 집의 편액(扁額)을 경재(景齋)라고 하여 매양 책을 대하여 날을 마치며 성현의 종지를 걸어두고 스스로 힘썼다.
집에 있을 때의 일은 안팎이 예(禮)가 있었고, 형제가 화순하여 부모를 섬기고 어진이를 친하는 데에 돈독하였다. 벗은 충성으로 사귀고 말은 믿음으로 하며 행동은 공경으로 하여 작은 것이라고 하여 소홀히 하지 않았다. 또한 남이 보지 않는 곳이라고 하여 방자히 하지 않았으며, 배우는 이에게는 항상 편하고 방자하게 되어 물욕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또 말하기를 겁배우는 사람은 매양 부지런하고 괴로운 가운데 모름지기 무한한 의미가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행장」)겂이라고 하였다.
과거 및 벼슬 : 배신은 42세(1561년)에 식년 진사 제2등으로 합격하였고(『司馬榜目』), 46세(1565년)에는 관천(館薦)으로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고, 경기전참봉, 빙고별좌를 지냈다.
강학 및 교유 : 배신은 11세(1530년)에 이제신(陶丘), 김범, 김희년(金禧年), 여응구 등과 더불어 벗을 삼아 친하게 지냈고(『陶丘實紀』), 40세(1559년)에는 당시 남명선생의 문인인 곽율, 정구(鄭逑), 김우옹 등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었다(『禮谷集』). 44세(1563년)에는 김우옹, 정구(鄭逑), 박성, 노흠, 김면, 배신, 이기춘 등과 더불어 도의로 교유하였다(『濯溪集』; 『月窩逸稿』).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1632년(인조 10년) 10월 13일에 고령(高靈)에 사는 전 참봉 이현룡(李見龍) 등이 상소하여, 배신을 포상하고 이름을 기록하여 선비를 숭상하는 도를 중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해 예조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배신의 학문과 덕행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선배들이 있긴 합니다마는, 그가 죽은 지가 오래되어 그의 학행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그를 사모하는 문하생과 후학들이 대궐 앞으로 나와 상소를 올려 조정에서 포상의 은전을 내려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이 선사(先師)를 위해 세상에 드러내려고 한 정성은 가상합니다마는 포상할 만한 근거가 없고 또 그가 후세에 남긴 글도 없어서 그가 실천한 행적을 상고하여 확인하기가 어려우니, 그에게 특별한 은전을 추증하기란 경솔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잠시 중외(中外)의 공론이 하나로 모아지기를 기다렸다가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仁祖實錄』 11년).
저술 : 배신은 「남명선생실기」와 「송계행장(松溪行狀)」을 남겼다.
향사 : 배신은 54세(1573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현풍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노수신(盧守愼), 허엽(許曄) 등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해 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봉향되었다.
□ 참고자료
『明宗實錄』 20년.
『宣祖修正實錄』 4년.
『仁祖實錄』 11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裵 紳, 『洛川集』 2권 2책.
李濟臣, 『陶丘實紀』 3권 1책.
郭 율, 『禮谷集』.
全致遠, 『濯溪集』 5권 1책.
陳克元, 『月窩逸稿』 2권 1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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