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131. 조식(曺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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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조식(曹湜, 1526∼1572)의 자는 유청(幼淸)이고 호는 매암(梅庵)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함양(咸陽)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6년(중종 21년) 8월 21일에 아버지 건(健)의 아들로 함양 석복촌(席卜村)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자료는 『매암일고(梅庵逸稿)』 2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그는 9세(1544년)에 『소학』을 공부하여, 10세(1545년)에는 일찍이 필법에 조예가 있어 봄에 성남루(城南樓)의 편액(額)을 썼다. 그는 당곡(唐谷, 鄭希輔)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11세(1546년)에는 당곡선생으로부터 『대학』을 배웠다.
30세(1555년) 겨울에는 방장산(方丈山)으로 가서 책을 읽었다.
급문 : 조식(曺湜)은 26세(1551년) 때 겨울 덕천서원으로 가서 남명선생을 찾아뵙고 주서(朱書)를 공부하였다(『德川師友淵源錄』, 卷4, 「門人續集」, 曺湜條; 『梅庵先生逸稿』, 卷2, 「年譜」 26歲條).
강학 및 교유 : 그는 17세(1542년) 봄에 『논어』를 공부하였다. 이 때 노진(盧禛), 이후백(李後白), 강익(姜翼), 정복현(鄭復顯), 노관(盧祼), 도희령(都希齡) 등과 더불어 절차강론(切磋講論)하였다. 당곡선생은 일찍이 ‘조모[曺某: 曺湜]는 진실로 호학(好學)하는 사람이다. 그의 나아감은 헤아릴 수 없다(『德川師友淵源錄』, 卷4, 「門人續集」 曺湜)’고 밝힌 바 있다.
21세(1546년) 봄에는 서계(西溪) 위에 재실을 지어 구인재(求仁齋)라고 편액하고, 이 구인재에서 노진, 김우옹, 강익, 도희령 등과 서로 학문과 덕을 닦았다.
38세(1563년) 봄에 노진에게 감사하는 글을 보냈는데 당시 노진이 담양(潭陽)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문안편지와 음식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40세(1565년,) 봄에 구인재에 머물렀다. 겨울에 오건, 노진 등과 남계서원에서 만났다. 41세(1566년) 여름에는 서계(西溪)에서 놀았다. 당시 강익, 노관, 정복현, 양홍택(梁弘澤), 김우굉, 김우옹 등과 남계서원에 모여서 대화를 나누었다. 44세(1569년) 봄에는 매곡(梅谷)으로 가서 정복현을 방문하여 리기지변(理氣之辨)을 나누었다.
그의 「사우록」에 의하면, 정희보(鄭希輔), 조식(曺植), 정탁(鄭琢), 임훈(林薰), 노진(盧禛), 정복현(鄭復顯), 강익(姜翼), 이후백(李後白), 양희(梁喜), 소세양(蘇世讓), 김우굉(金宇宏), 김우용(金宇容), 김우옹(金宇顒), 오건(吳健), 변사정(邊士貞), 정유명(鄭惟明), 성팽년(成彭年), 임희무(林希茂), 도희령(都希齡), 노관(盧祼), 정지(鄭摯), 강문필(姜文弼) 등과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저술 : 그는 32세 가을에 『이후록(貽后錄)』(1557년)을 지었다.
서원창건활동 : 조식(曺湜, 27세, 1552년)은 남계서원의 설립에 관해 강익, 정복현, 노관 등과 함께 서원의 강당 설립을 논의하였다.
1559년(34세)에 남계서원이 세워졌고 그 후 1564년(39세)에는 「백록동원규(白鹿洞院規)」를 써서 남계서원에 걸었다. 이 해에 김우홍이 이 고을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김우홍과 의논하여 동서재(東西齋)를 중건하였다. 좌우에 작은 연못을 만들었고, 연못 가운데는 홍백련(紅白蓮)을 심었다. 연못 주변에는 매화(梅), 대나무(竹), 소나무(松)를 심었고, 길을 따라 정연하게 섬돌을 깔아 놓았다. 그가 당(堂)의 편액을 「명성(明誠)」이라고 좌우에 크게 써서 「거경집의(居敬集義)」라고 하였고, 동서(東西)에는 「양정보인(養正輔仁)」이라 하였고, 그 처마(軒)에는 「애련영매(愛蓮詠梅)」라 하였고, 그 문(門)에는 「존도(尊道)」라고 하였다. 또한 「백록동오교지목(白鹿洞五敎之目)」을 쓰기도 하였다. 43세 때(1568년, 무진) 덕봉 진사공의 묘에 가서 성묘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계서원울 배알하였다.
1572년(선조 5년) 10월 20일에 서계정사에서 조식(曺湜)은 4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曺 湜, 『梅庵先生逸稿』, 2권 1책.
조식(曹湜, 1526∼1572)의 자는 유청(幼淸)이고 호는 매암(梅庵)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함양(咸陽)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6년(중종 21년) 8월 21일에 아버지 건(健)의 아들로 함양 석복촌(席卜村)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자료는 『매암일고(梅庵逸稿)』 2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그는 9세(1544년)에 『소학』을 공부하여, 10세(1545년)에는 일찍이 필법에 조예가 있어 봄에 성남루(城南樓)의 편액(額)을 썼다. 그는 당곡(唐谷, 鄭希輔)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11세(1546년)에는 당곡선생으로부터 『대학』을 배웠다.
30세(1555년) 겨울에는 방장산(方丈山)으로 가서 책을 읽었다.
급문 : 조식(曺湜)은 26세(1551년) 때 겨울 덕천서원으로 가서 남명선생을 찾아뵙고 주서(朱書)를 공부하였다(『德川師友淵源錄』, 卷4, 「門人續集」, 曺湜條; 『梅庵先生逸稿』, 卷2, 「年譜」 26歲條).
강학 및 교유 : 그는 17세(1542년) 봄에 『논어』를 공부하였다. 이 때 노진(盧禛), 이후백(李後白), 강익(姜翼), 정복현(鄭復顯), 노관(盧祼), 도희령(都希齡) 등과 더불어 절차강론(切磋講論)하였다. 당곡선생은 일찍이 ‘조모[曺某: 曺湜]는 진실로 호학(好學)하는 사람이다. 그의 나아감은 헤아릴 수 없다(『德川師友淵源錄』, 卷4, 「門人續集」 曺湜)’고 밝힌 바 있다.
21세(1546년) 봄에는 서계(西溪) 위에 재실을 지어 구인재(求仁齋)라고 편액하고, 이 구인재에서 노진, 김우옹, 강익, 도희령 등과 서로 학문과 덕을 닦았다.
38세(1563년) 봄에 노진에게 감사하는 글을 보냈는데 당시 노진이 담양(潭陽)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문안편지와 음식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40세(1565년,) 봄에 구인재에 머물렀다. 겨울에 오건, 노진 등과 남계서원에서 만났다. 41세(1566년) 여름에는 서계(西溪)에서 놀았다. 당시 강익, 노관, 정복현, 양홍택(梁弘澤), 김우굉, 김우옹 등과 남계서원에 모여서 대화를 나누었다. 44세(1569년) 봄에는 매곡(梅谷)으로 가서 정복현을 방문하여 리기지변(理氣之辨)을 나누었다.
그의 「사우록」에 의하면, 정희보(鄭希輔), 조식(曺植), 정탁(鄭琢), 임훈(林薰), 노진(盧禛), 정복현(鄭復顯), 강익(姜翼), 이후백(李後白), 양희(梁喜), 소세양(蘇世讓), 김우굉(金宇宏), 김우용(金宇容), 김우옹(金宇顒), 오건(吳健), 변사정(邊士貞), 정유명(鄭惟明), 성팽년(成彭年), 임희무(林希茂), 도희령(都希齡), 노관(盧祼), 정지(鄭摯), 강문필(姜文弼) 등과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저술 : 그는 32세 가을에 『이후록(貽后錄)』(1557년)을 지었다.
서원창건활동 : 조식(曺湜, 27세, 1552년)은 남계서원의 설립에 관해 강익, 정복현, 노관 등과 함께 서원의 강당 설립을 논의하였다.
1559년(34세)에 남계서원이 세워졌고 그 후 1564년(39세)에는 「백록동원규(白鹿洞院規)」를 써서 남계서원에 걸었다. 이 해에 김우홍이 이 고을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김우홍과 의논하여 동서재(東西齋)를 중건하였다. 좌우에 작은 연못을 만들었고, 연못 가운데는 홍백련(紅白蓮)을 심었다. 연못 주변에는 매화(梅), 대나무(竹), 소나무(松)를 심었고, 길을 따라 정연하게 섬돌을 깔아 놓았다. 그가 당(堂)의 편액을 「명성(明誠)」이라고 좌우에 크게 써서 「거경집의(居敬集義)」라고 하였고, 동서(東西)에는 「양정보인(養正輔仁)」이라 하였고, 그 처마(軒)에는 「애련영매(愛蓮詠梅)」라 하였고, 그 문(門)에는 「존도(尊道)」라고 하였다. 또한 「백록동오교지목(白鹿洞五敎之目)」을 쓰기도 하였다. 43세 때(1568년, 무진) 덕봉 진사공의 묘에 가서 성묘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계서원울 배알하였다.
1572년(선조 5년) 10월 20일에 서계정사에서 조식(曺湜)은 4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曺 湜, 『梅庵先生逸稿』, 2권 1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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