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107. 진극원(陳克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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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진극원(陳克元, 初名 守昌, 1534∼1595)의 자는 경여(敬汝)이고 호는 월와(月窩)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으로 초계(草溪)에 거주하였다. 그는 1534년(중종 29년) 6월 초 10일에 아버지 참봉공(參奉公) 선(宣)의 아들로 공파주(坡州) 삼현리(三峴里)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자료는 『월와일고(月窩逸稿)』 2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진극원은 10세(1543년)에 문의(文義)를 해독하였고, 예의가 능하여 이웃 마을에서 가상히 여겼다고 한다. 14세(1547년)에 사서(四書)에 통하였고, 17세(1550년)에는 널리 경사(經史)를 섭렵하고, 학업이 크게 진작되었다. 18세(1551년)에는 아버지 참봉공(參奉公)의 명으로, 과거공부를 업으로 하였다.
24세(1557년)에는 이학(理學)에 침잠하였고 사장(詞章)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급문 : 그는 22세(1555년) 봄에 삼가(三嘉) 토동정사(兎洞精舍)로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속수의 예를 드렸다(『月窩逸稿』, 「年譜」 22歲條).
과거 및 벼슬 : 진극원은 19세(1552년) 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되고 알성문과(謁聖文科)를 보았다.
그는 21세(1554년) 겨울에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불렀으나, 학업의 미취(未就)로 사양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이 해에 참봉공(參奉公)이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는 사화의 참혹함이 있었고, 멀리 피하고자 하여 남하(南下)하여 초계군(草溪郡)에 머물렀다.
강학 및 교유 : 진극원은 26세(1559년) 5월에 황강(黃江, 李希顔)선생의 죽음에 곡하였으며, 「만시제문」을 지었고, 28세(1561년) 가을 8월에 전치원을 찾아 갔다. 당시 그의 아우 진극경이 따라와 전치원과 함께하였으며, 공경하고 중히 여기면서 이르기를 ‘진씨(陳氏)의 가문에 장차 점점 나아감이 있을 것(『月窩逸稿』)’이라고 하였다.
30세(1563년)에 산천재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뵈었는데, 이 때 재종제 진극인도 함께 따라 갔다. 김면, 배신, 김우옹, 정구(鄭逑), 박성(朴惺), 노흠, 이기춘(李起春) 등과 도의로 교유하였다(『濯溪集』). 31세 때(1564년) 4월에 곽율이 찾아왔는데, 이 때 전우(全雨)가 함께하였다.
49세(1582년) 가을에는 참봉공(參奉公)의 묘 아래에 모헌(慕軒)을 지었고, 53세(1586년) 봄에는 강학지인 월와(月窩)를 완성하였다.
의병활동 : 1592년(선조 25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진극원은 같은 고을의 사우(士友)들과 함께 창의하였고, 사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陳克元, 『月窩逸稿』 2권 1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16.
진극원(陳克元, 初名 守昌, 1534∼1595)의 자는 경여(敬汝)이고 호는 월와(月窩)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으로 초계(草溪)에 거주하였다. 그는 1534년(중종 29년) 6월 초 10일에 아버지 참봉공(參奉公) 선(宣)의 아들로 공파주(坡州) 삼현리(三峴里)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자료는 『월와일고(月窩逸稿)』 2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진극원은 10세(1543년)에 문의(文義)를 해독하였고, 예의가 능하여 이웃 마을에서 가상히 여겼다고 한다. 14세(1547년)에 사서(四書)에 통하였고, 17세(1550년)에는 널리 경사(經史)를 섭렵하고, 학업이 크게 진작되었다. 18세(1551년)에는 아버지 참봉공(參奉公)의 명으로, 과거공부를 업으로 하였다.
24세(1557년)에는 이학(理學)에 침잠하였고 사장(詞章)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급문 : 그는 22세(1555년) 봄에 삼가(三嘉) 토동정사(兎洞精舍)로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속수의 예를 드렸다(『月窩逸稿』, 「年譜」 22歲條).
과거 및 벼슬 : 진극원은 19세(1552년) 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되고 알성문과(謁聖文科)를 보았다.
그는 21세(1554년) 겨울에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불렀으나, 학업의 미취(未就)로 사양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이 해에 참봉공(參奉公)이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는 사화의 참혹함이 있었고, 멀리 피하고자 하여 남하(南下)하여 초계군(草溪郡)에 머물렀다.
강학 및 교유 : 진극원은 26세(1559년) 5월에 황강(黃江, 李希顔)선생의 죽음에 곡하였으며, 「만시제문」을 지었고, 28세(1561년) 가을 8월에 전치원을 찾아 갔다. 당시 그의 아우 진극경이 따라와 전치원과 함께하였으며, 공경하고 중히 여기면서 이르기를 ‘진씨(陳氏)의 가문에 장차 점점 나아감이 있을 것(『月窩逸稿』)’이라고 하였다.
30세(1563년)에 산천재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뵈었는데, 이 때 재종제 진극인도 함께 따라 갔다. 김면, 배신, 김우옹, 정구(鄭逑), 박성(朴惺), 노흠, 이기춘(李起春) 등과 도의로 교유하였다(『濯溪集』). 31세 때(1564년) 4월에 곽율이 찾아왔는데, 이 때 전우(全雨)가 함께하였다.
49세(1582년) 가을에는 참봉공(參奉公)의 묘 아래에 모헌(慕軒)을 지었고, 53세(1586년) 봄에는 강학지인 월와(月窩)를 완성하였다.
의병활동 : 1592년(선조 25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진극원은 같은 고을의 사우(士友)들과 함께 창의하였고, 사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陳克元, 『月窩逸稿』 2권 1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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