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108. 박이현(朴而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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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박이현(朴而絢, 1544~1592)의 자는 여수(汝粹)이고 시호는 의민(毅愍)이며, 본관은 순천(順天)으로 성주(星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4년(중종 39년)에 참봉 대영(大榮)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창애서실(蒼厓書室)을 짓고서 위기지학에 힘썼으며, 오건과 강마(講磨)하고 종유하면서 경의(敬義)의 요지를 듣고 체인(體認)하였다(『德川師友淵源錄』, 卷4, 「門人續集」, 朴而絢).
의병활동 : 1592년(선조 25년)에 왜적이 침입하자 임금이 용만(龍灣)으로 거동하니, 그가 서생(書生)으로 집에 있다가 국사가 급한 것을 보고 의연히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집안 동생인 박이장(朴而章)과 더불어 동지들과 창기(倡起)하였다. 그는 김면(金沔)의 군(軍)에 가담하여 성주(星州) 가천(伽川)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나 겨울에 무주로부터 회군하다가 추위와 군세의 부족으로 포로가 되어 끝내 굴하지 않고 전사하였다.
향사 : 그는 1592년(선조 25년)에 왜란으로 세상을 떠난 후 조정에서는 특별히 참의(參議)에 증직하였고, 후에 그의 아들 영서(永緖)의 사절(死節)로 인하여 1644년(인조 22년)에 공조판서로 증직되었다. 1728년(영조 4년)에 시호가 하사되었다. 후에 성주(星州)의 덕봉(德峰) 충렬사(忠烈祠)와 순천(順天)의 세덕사(世德祠)에 향사되었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9.
박이현(朴而絢, 1544~1592)의 자는 여수(汝粹)이고 시호는 의민(毅愍)이며, 본관은 순천(順天)으로 성주(星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4년(중종 39년)에 참봉 대영(大榮)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창애서실(蒼厓書室)을 짓고서 위기지학에 힘썼으며, 오건과 강마(講磨)하고 종유하면서 경의(敬義)의 요지를 듣고 체인(體認)하였다(『德川師友淵源錄』, 卷4, 「門人續集」, 朴而絢).
의병활동 : 1592년(선조 25년)에 왜적이 침입하자 임금이 용만(龍灣)으로 거동하니, 그가 서생(書生)으로 집에 있다가 국사가 급한 것을 보고 의연히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집안 동생인 박이장(朴而章)과 더불어 동지들과 창기(倡起)하였다. 그는 김면(金沔)의 군(軍)에 가담하여 성주(星州) 가천(伽川)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나 겨울에 무주로부터 회군하다가 추위와 군세의 부족으로 포로가 되어 끝내 굴하지 않고 전사하였다.
향사 : 그는 1592년(선조 25년)에 왜란으로 세상을 떠난 후 조정에서는 특별히 참의(參議)에 증직하였고, 후에 그의 아들 영서(永緖)의 사절(死節)로 인하여 1644년(인조 22년)에 공조판서로 증직되었다. 1728년(영조 4년)에 시호가 하사되었다. 후에 성주(星州)의 덕봉(德峰) 충렬사(忠烈祠)와 순천(順天)의 세덕사(世德祠)에 향사되었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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