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115. 허봉(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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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허봉(許, 1551∼1588)의 자는 미숙(美叔)이고 호는 하곡(荷谷)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그는 1551년(명종 6년) 6월 25일에 동지중추부사 엽(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난설헌(蘭雪軒)의 오빠이자 균(筠)의 형인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자료는 『하곡시초(荷谷詩抄)』 1책과 『하곡선생조천기(荷谷先生朝天記)』 3권 3책이 전한다.
허봉은 7세 때부터 글을 지었다. 10세(1560년)에 경사(經史)에 통하여 시문을 지으니 스스로 순숙(純熟)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총명함은 이에 견줄 만한 이가 없을 정도여서 무릇 책을 볼 때 한 번 읽으면 잊지 않았다고 한다.
과거 및 벼슬 : 허봉은 18세(1568년)에 생원시(증광 생원 1등)에 장원급제하였고, 22세(1572년)에는 증광별(增廣別: 春壙臺枋)에 병과로 등과하였다.
그는 22세(1572년)에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 예문관(藝文館)에 제수되었고, 23세(1573년)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누렸다. 24세(1574년)에는 박희립(朴希立)의 성절사행에 서장관을 자청해 조헌(趙憲) 등과 함께 중국에 가서 주륙지변(朱陸之辨)을 논란하니 학자들이 굴하지는 않았으나 모두 탄복했다고 한다. 동년 10월 23일에 부수찬에 제수되었다(『宣祖實錄』 7년). 25세(1575년)에는 이조좌랑을 맡았으나 탄핵을 입어 승문원 검교(承文院檢校)로 체직되었다가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으나 배수하지 않았다. 26세(1576년)에는 홍문관(弘文館),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역임하였고, 27세(1577년)에는 교리가 되었다.
32세(1582년)에 상을 마치고 여러 번 응교(應敎), 사간(司諫), 집의(執義)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다가 겨울에 원접사(遠接使) 이이(李珥)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황태자탄생 축하조서를 받든 조사(詔使) 황홍헌(黃洪憲), 왕경민(王敬民)을 의주에서 맞이하였다. 이 때 두 사신이 모두 허봉의 문장에 감복하여 이별할 때 선구시(扇求詩)를 요청하니, 그가 일필휘지로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 때 두 사신이 가작(佳作)이라고 탄복하며 황태사가 역관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이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옥서(玉署)‧금마(金馬)에서 일두를 양보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33세(1583년)에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으나, 가을에 박근원(朴謹元)‧송응개(宋應漑) 등과 함께 이이(李珥)의 과실에 대한 배척시론(排斥時論)에 참여했다가 문책을 받게 되어 창원부사(昌原副使)의 배명이 취소되고, 가장 멀고 험한 지역인 함경도의 종성(鐘城: 지금의 甲山)으로 유배되었다(『宣祖實錄』 16년)
35세(1585년)에는 노수신과 유성룡의 도움으로 풀려나와 다시 기용되었으나, 거절하고 백운산(白雲山), 인천과 춘천 등지를 독서와 방랑으로 자적하였으며, 38세(1588년)에는 현실에 대한 뜻을 잃고 금강산의 대명암(大明庵)에 들어가 방랑하다가 황달과 한담을 얻어 고생하였다. 이를 치료하려고 상경하던 중 김화현(金化縣) 생창역(生昌驛)에서 객사하였다(『宣祖實錄』 21년).
저술 : 허봉은 38세의 짧은 나이와 상당기간의 방랑생활에도 불구하고, 『하곡집(荷谷集)』, 『조천기(朝天記)』, 『하곡수어(荷谷粹語)』, 『북변기록(北邊記錄)』, 『의례산주(儀禮刪註)』, 『독역관견(讀易管見)』, 『해동야언(海東野言)』 등의 저술을 남길 만큼 광범위한 저술활동을 보여 주었다.
그는 1551년(명종 6년)에서 1588년(선조 21년)까지 38세의 짧은 나이로 병사하였고, 아우인 균의 참화로 인해 문헌이나 문학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5년~8년, 10년~16년, 18년, 21년, 31년, 33년, 38년~39년.
『宣祖修正實錄』 6년~7년, 11년, 15년~19년, 22년, 31년.
『光海君日記』 4년, 8년, 10년.
『仁祖實錄』 7년, 14년.
『顯宗改修實錄』 2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2‧4‧20‧23‧24.
許 篈, 『荷谷集』 1책(『韓國文集叢刊』 57), 民族文化推進會, 1990.
許 篈, 『荷谷先生朝天記』 3권 3책.
許蘭雪軒, 『蘭雪軒集』, 韓國文集叢刊本.
權 徽, 『國朝詩刪許門世藁』(李離和 編, 許筠全書), 서울: 亞細亞文化社, 1980.
安炳鶴, 「許筠의 文學觀 硏究」 『民族文化硏究』 15,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0.
허경진, 『許筠의 詩話』, 서울: 민음사, 1982.
허경진, 『許筠詩硏究』, 서울: 평민사, 1984.
李淑姬, 『許蘭雪軒의 詩論』, 서울: 새문사, 1985.
呂運弼, 「荷谷詩 考察」 『睡蓮語文論集』 14, 부산여대 국어교육과, 1987.
孫會文, 『荷谷 許篈의 漢詩硏究」, 成均館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92.
宋垠姃, 「荷谷 許篈의 詩世界」 『東方漢文學』 12, 東方漢文學會, 1996.
허봉(許, 1551∼1588)의 자는 미숙(美叔)이고 호는 하곡(荷谷)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그는 1551년(명종 6년) 6월 25일에 동지중추부사 엽(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난설헌(蘭雪軒)의 오빠이자 균(筠)의 형인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자료는 『하곡시초(荷谷詩抄)』 1책과 『하곡선생조천기(荷谷先生朝天記)』 3권 3책이 전한다.
허봉은 7세 때부터 글을 지었다. 10세(1560년)에 경사(經史)에 통하여 시문을 지으니 스스로 순숙(純熟)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총명함은 이에 견줄 만한 이가 없을 정도여서 무릇 책을 볼 때 한 번 읽으면 잊지 않았다고 한다.
과거 및 벼슬 : 허봉은 18세(1568년)에 생원시(증광 생원 1등)에 장원급제하였고, 22세(1572년)에는 증광별(增廣別: 春壙臺枋)에 병과로 등과하였다.
그는 22세(1572년)에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 예문관(藝文館)에 제수되었고, 23세(1573년)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누렸다. 24세(1574년)에는 박희립(朴希立)의 성절사행에 서장관을 자청해 조헌(趙憲) 등과 함께 중국에 가서 주륙지변(朱陸之辨)을 논란하니 학자들이 굴하지는 않았으나 모두 탄복했다고 한다. 동년 10월 23일에 부수찬에 제수되었다(『宣祖實錄』 7년). 25세(1575년)에는 이조좌랑을 맡았으나 탄핵을 입어 승문원 검교(承文院檢校)로 체직되었다가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으나 배수하지 않았다. 26세(1576년)에는 홍문관(弘文館),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역임하였고, 27세(1577년)에는 교리가 되었다.
32세(1582년)에 상을 마치고 여러 번 응교(應敎), 사간(司諫), 집의(執義)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다가 겨울에 원접사(遠接使) 이이(李珥)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황태자탄생 축하조서를 받든 조사(詔使) 황홍헌(黃洪憲), 왕경민(王敬民)을 의주에서 맞이하였다. 이 때 두 사신이 모두 허봉의 문장에 감복하여 이별할 때 선구시(扇求詩)를 요청하니, 그가 일필휘지로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 때 두 사신이 가작(佳作)이라고 탄복하며 황태사가 역관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이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옥서(玉署)‧금마(金馬)에서 일두를 양보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33세(1583년)에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으나, 가을에 박근원(朴謹元)‧송응개(宋應漑) 등과 함께 이이(李珥)의 과실에 대한 배척시론(排斥時論)에 참여했다가 문책을 받게 되어 창원부사(昌原副使)의 배명이 취소되고, 가장 멀고 험한 지역인 함경도의 종성(鐘城: 지금의 甲山)으로 유배되었다(『宣祖實錄』 16년)
35세(1585년)에는 노수신과 유성룡의 도움으로 풀려나와 다시 기용되었으나, 거절하고 백운산(白雲山), 인천과 춘천 등지를 독서와 방랑으로 자적하였으며, 38세(1588년)에는 현실에 대한 뜻을 잃고 금강산의 대명암(大明庵)에 들어가 방랑하다가 황달과 한담을 얻어 고생하였다. 이를 치료하려고 상경하던 중 김화현(金化縣) 생창역(生昌驛)에서 객사하였다(『宣祖實錄』 21년).
저술 : 허봉은 38세의 짧은 나이와 상당기간의 방랑생활에도 불구하고, 『하곡집(荷谷集)』, 『조천기(朝天記)』, 『하곡수어(荷谷粹語)』, 『북변기록(北邊記錄)』, 『의례산주(儀禮刪註)』, 『독역관견(讀易管見)』, 『해동야언(海東野言)』 등의 저술을 남길 만큼 광범위한 저술활동을 보여 주었다.
그는 1551년(명종 6년)에서 1588년(선조 21년)까지 38세의 짧은 나이로 병사하였고, 아우인 균의 참화로 인해 문헌이나 문학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5년~8년, 10년~16년, 18년, 21년, 31년, 33년, 38년~39년.
『宣祖修正實錄』 6년~7년, 11년, 15년~19년, 22년, 31년.
『光海君日記』 4년, 8년, 10년.
『仁祖實錄』 7년, 14년.
『顯宗改修實錄』 2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2‧4‧20‧23‧24.
許 篈, 『荷谷集』 1책(『韓國文集叢刊』 57), 民族文化推進會, 1990.
許 篈, 『荷谷先生朝天記』 3권 3책.
許蘭雪軒, 『蘭雪軒集』, 韓國文集叢刊本.
權 徽, 『國朝詩刪許門世藁』(李離和 編, 許筠全書), 서울: 亞細亞文化社, 1980.
安炳鶴, 「許筠의 文學觀 硏究」 『民族文化硏究』 15,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0.
허경진, 『許筠의 詩話』, 서울: 민음사, 1982.
허경진, 『許筠詩硏究』, 서울: 평민사, 1984.
李淑姬, 『許蘭雪軒의 詩論』, 서울: 새문사, 1985.
呂運弼, 「荷谷詩 考察」 『睡蓮語文論集』 14, 부산여대 국어교육과, 1987.
孫會文, 『荷谷 許篈의 漢詩硏究」, 成均館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92.
宋垠姃, 「荷谷 許篈의 詩世界」 『東方漢文學』 12, 東方漢文學會,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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