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88. 박계현(朴啓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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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박계현(朴啓賢, 1524∼1580)의 자는 군옥(君玉)이고 호는 관원(灌園) 또는 근사재(近思齋)라고도 하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그는 1524년(중종 19년)에 승지 박충원(朴忠元)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디 문명(文名)이 있었다.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관원집(灌園集)』 2권 1책이 전하며 편서로는 『밀산세고(密山世稿)』가 있다.
과거 및 벼슬 : 박계현은 20세(1543년)에 식년 진사 제1등으로 합격하였고(『司馬榜目』), 27세(1550년) 4월 24일에 근정전 뜰에서 유생에게 제술(製述) 시험을 보았는데, 진사(進士) 박계현(朴啓賢)이 우등을 차지하였는데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명받았다(『明宗實錄』 5년)고 한다.
그는 29세(1552년) 5월 17일에 검열이 되었고(『明宗實錄』 7년), 31세(1554년) 2월 14일에 박사가 되었다(『明宗實錄』 9년). 32세(1555년) 7월 2일에는 경상좌도 평사가 되었다. 9월 5일에 사가독서(賜暇讀書)에 피선되었고, 9월 14일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明宗實錄』 10년). 34세(1557년) 3월 22일에는 부수찬이 되었고, 3월 27일에는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으며, 5월 28일에 이조정랑이 되었다(『明宗實錄』 12년). 35세(1558년) 6월 25일에 의정부 검상이 되었고, 10월 9일에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明宗實錄』 13년). 36세(1559년) 5월 17일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7월 8일에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으며, 10월 10일에 장단 도호부사(長湍都護府使)가 되었는데, 특명으로 “백성과 가까운 관리로는 수령만한 자가 없다. 특별히 박계현을 보내 쇠잔한 고을을 소생시키도록 하라(『明宗實錄』 14년)”는 전교가 있었다. 37세(1560) 4월 27일에는 만포진 병마첨절제사가 되었고, 12월 3일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12월 9일에 승정원 우부승지가 되었다(『明宗實錄』 15년).
박계현이 39세 때인 명종 17년(1562년) 2월 25일의 실록기사에 의하면, 명종은 정유길과 이양에게 다음과 같은 어서(御書)를 내렸다.
지금 홍천민과 윤의중과 박계현을 앞으로 나오게 해서 논란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 어서(御書)의 내용은 ‘요(堯)와 순(舜)의 정일집중(精一執中)하는 학문, 하(夏)나라 우(禹) 임금의 홍수 다스린 일, 성탕(成湯)이 그물을 풀고 짐승을 놓아준 일, 문왕(文王)이 정사를 하여 인(仁)을 베풀되 반드시 홀아비나 과부 등을 우선적으로 돌보아 천하의 3분의 2를 소유하게 된 일, 무왕(武王)이 주(紂)를 쳐부수고 기자(箕子)를 방문하여 홍범(洪範)을 물은 일, 한(漢)나라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때 백성들이 잘 살게 된 일, 당(唐)나라 건성(建成)의 난, 송(宋)나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북쪽 오랑캐에게 포로가 된 일, 어느 시대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조화되었던가 하는 문제, 선조(先朝) 때의 중국 사신들의 시문(詩文)의 우열, 우리 나라 옛사람 중에서 시(詩)에 가장 능했던 사람, 선조 때 나세찬(羅世纘)이 제술을 했다가 김안로에게 해를 받은 일, 난정(蘭亭)에서 수계한 일이었다. 박계현이 답하기를,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는 것이 심학(心學)의 근원인데, 그것을 발로시켜서 말로 표현한 것은 요순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 ’. 5월 16일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明宗實錄』 17년).
40세(1563년) 1월 4일에는 우승지가 되었고, 3월 11일에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6월 25일에 좌승지가 되었다. 12월 29일에 예조참의가 되었다(『明宗實錄』 18년). 44세(1567년)에는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권벌, 이언적 등의 신원을 계청하였다. 47세(1570년) 5월 21일에는 대사헌이 되었고(『宣祖實錄』 3년), 48세(1571년) 9월 10일에는 호조판서가 되었다(『宣祖實錄』 4년).
50세(1573년) 3월 29일에는 예조참판(禮曹參判)에서 함경감사로 제수되었고(『宣祖實錄』 6년), 52세(1575년) 12월 11일에는 이조참판이 되었으며(『宣祖實錄』 8년), 53세(1576년) 8월 23일에는 대사헌이 되었다(『宣祖實錄』 9년). 54세(1577년) 3월 18일에 대사간이 되었다(『宣祖實錄』 10년).
선조 13년(1580년) 4월 1일의 실록기사에 보이는 졸기는 다음과 같다.
지중추부사 박계현(朴啓賢)이 졸하였다. 계현은 박충원(朴忠元)의 아들로 부자가 동시에 육경이 되었었는데 방탕하고 행검이 없어 오직 술이나 마시고 우스갯소리나 할 따름이었다. 상은 그가 명론(名論)과 교격(矯激)을 좋아하지 않은 것 때문에 총애를 보였었는데, 그가 졸했다는 부음을 듣고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宣祖修正實錄』 13년).
□ 참고자료
『明宗實錄』 5년, 7년~22년.
『宣祖實錄』 2년~10년, 21년, 26년.
『宣祖修正實錄』 9년, 13년, 25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3‧8.
박계현(朴啓賢, 1524∼1580)의 자는 군옥(君玉)이고 호는 관원(灌園) 또는 근사재(近思齋)라고도 하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그는 1524년(중종 19년)에 승지 박충원(朴忠元)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디 문명(文名)이 있었다.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관원집(灌園集)』 2권 1책이 전하며 편서로는 『밀산세고(密山世稿)』가 있다.
과거 및 벼슬 : 박계현은 20세(1543년)에 식년 진사 제1등으로 합격하였고(『司馬榜目』), 27세(1550년) 4월 24일에 근정전 뜰에서 유생에게 제술(製述) 시험을 보았는데, 진사(進士) 박계현(朴啓賢)이 우등을 차지하였는데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명받았다(『明宗實錄』 5년)고 한다.
그는 29세(1552년) 5월 17일에 검열이 되었고(『明宗實錄』 7년), 31세(1554년) 2월 14일에 박사가 되었다(『明宗實錄』 9년). 32세(1555년) 7월 2일에는 경상좌도 평사가 되었다. 9월 5일에 사가독서(賜暇讀書)에 피선되었고, 9월 14일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明宗實錄』 10년). 34세(1557년) 3월 22일에는 부수찬이 되었고, 3월 27일에는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으며, 5월 28일에 이조정랑이 되었다(『明宗實錄』 12년). 35세(1558년) 6월 25일에 의정부 검상이 되었고, 10월 9일에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明宗實錄』 13년). 36세(1559년) 5월 17일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7월 8일에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으며, 10월 10일에 장단 도호부사(長湍都護府使)가 되었는데, 특명으로 “백성과 가까운 관리로는 수령만한 자가 없다. 특별히 박계현을 보내 쇠잔한 고을을 소생시키도록 하라(『明宗實錄』 14년)”는 전교가 있었다. 37세(1560) 4월 27일에는 만포진 병마첨절제사가 되었고, 12월 3일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12월 9일에 승정원 우부승지가 되었다(『明宗實錄』 15년).
박계현이 39세 때인 명종 17년(1562년) 2월 25일의 실록기사에 의하면, 명종은 정유길과 이양에게 다음과 같은 어서(御書)를 내렸다.
지금 홍천민과 윤의중과 박계현을 앞으로 나오게 해서 논란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 어서(御書)의 내용은 ‘요(堯)와 순(舜)의 정일집중(精一執中)하는 학문, 하(夏)나라 우(禹) 임금의 홍수 다스린 일, 성탕(成湯)이 그물을 풀고 짐승을 놓아준 일, 문왕(文王)이 정사를 하여 인(仁)을 베풀되 반드시 홀아비나 과부 등을 우선적으로 돌보아 천하의 3분의 2를 소유하게 된 일, 무왕(武王)이 주(紂)를 쳐부수고 기자(箕子)를 방문하여 홍범(洪範)을 물은 일, 한(漢)나라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때 백성들이 잘 살게 된 일, 당(唐)나라 건성(建成)의 난, 송(宋)나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북쪽 오랑캐에게 포로가 된 일, 어느 시대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조화되었던가 하는 문제, 선조(先朝) 때의 중국 사신들의 시문(詩文)의 우열, 우리 나라 옛사람 중에서 시(詩)에 가장 능했던 사람, 선조 때 나세찬(羅世纘)이 제술을 했다가 김안로에게 해를 받은 일, 난정(蘭亭)에서 수계한 일이었다. 박계현이 답하기를,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는 것이 심학(心學)의 근원인데, 그것을 발로시켜서 말로 표현한 것은 요순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 ’. 5월 16일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明宗實錄』 17년).
40세(1563년) 1월 4일에는 우승지가 되었고, 3월 11일에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6월 25일에 좌승지가 되었다. 12월 29일에 예조참의가 되었다(『明宗實錄』 18년). 44세(1567년)에는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권벌, 이언적 등의 신원을 계청하였다. 47세(1570년) 5월 21일에는 대사헌이 되었고(『宣祖實錄』 3년), 48세(1571년) 9월 10일에는 호조판서가 되었다(『宣祖實錄』 4년).
50세(1573년) 3월 29일에는 예조참판(禮曹參判)에서 함경감사로 제수되었고(『宣祖實錄』 6년), 52세(1575년) 12월 11일에는 이조참판이 되었으며(『宣祖實錄』 8년), 53세(1576년) 8월 23일에는 대사헌이 되었다(『宣祖實錄』 9년). 54세(1577년) 3월 18일에 대사간이 되었다(『宣祖實錄』 10년).
선조 13년(1580년) 4월 1일의 실록기사에 보이는 졸기는 다음과 같다.
지중추부사 박계현(朴啓賢)이 졸하였다. 계현은 박충원(朴忠元)의 아들로 부자가 동시에 육경이 되었었는데 방탕하고 행검이 없어 오직 술이나 마시고 우스갯소리나 할 따름이었다. 상은 그가 명론(名論)과 교격(矯激)을 좋아하지 않은 것 때문에 총애를 보였었는데, 그가 졸했다는 부음을 듣고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宣祖修正實錄』 13년).
□ 참고자료
『明宗實錄』 5년, 7년~22년.
『宣祖實錄』 2년~10년, 21년, 26년.
『宣祖修正實錄』 9년, 13년, 25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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