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97. 권유(權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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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권유(權愉)는 남명선생이 남해에 유배되어 있는 정황(丁熿)을 찾아 예(禮)에 대한 문답을 할 때 함께 하였으며, 약관 이전의 나이에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현감을 지냈다.
1594년(선조 27년)의 실록기사에 의하면, 최영경을 추증할 것을 하명하는 내용 중에 권유(權愉)는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무진년과 기사년 사이 최영경(崔永慶)이 서울에 있을 때에는 바로 정철(鄭澈)이 입사(入仕)하여 현달하게 드날리던 시기였다. 정철이 최영경의 명성을 듣고 한 번 만나기를 원했으나 영경이 이미 그의 심술(心術)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인품을 천박하게 여겨 끝내 만나지 않았다. 영경이 남쪽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동서(東西)의 당설(黨說)이 일어나게 되자, 영남의 선비들은 모두 정철의 인품을 허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최영경이 가가호호 찾아다니면서 정철을 허여하지 못하게 설득한 것이 아닌데도, 정철은 이것을 실상 영경의 창도(倡導)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여겨 깊은 유감을 품고 있었다. 마침 역적의 옥사(獄事)가 일어나게 되자, 이를 이용하여 무함하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일을 만들어 내어 부도(不道)라는 이름을 씌워 옥에 잡아 가두고는 온갖 방법으로 곤욕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성상의 살피심이 매우 밝으셨고 공론(公論)이 민멸되지 않아서 마침내 애매한 일이라 하여 방출(放出)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철이 기필코 그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잡아 가두어 끝내 옥중에서 죽게 하였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宣祖實錄』 27년 5월 4일조).
□ 참고자료
『宣祖實錄』 26년~27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3.
권유(權愉)는 남명선생이 남해에 유배되어 있는 정황(丁熿)을 찾아 예(禮)에 대한 문답을 할 때 함께 하였으며, 약관 이전의 나이에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현감을 지냈다.
1594년(선조 27년)의 실록기사에 의하면, 최영경을 추증할 것을 하명하는 내용 중에 권유(權愉)는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무진년과 기사년 사이 최영경(崔永慶)이 서울에 있을 때에는 바로 정철(鄭澈)이 입사(入仕)하여 현달하게 드날리던 시기였다. 정철이 최영경의 명성을 듣고 한 번 만나기를 원했으나 영경이 이미 그의 심술(心術)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인품을 천박하게 여겨 끝내 만나지 않았다. 영경이 남쪽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동서(東西)의 당설(黨說)이 일어나게 되자, 영남의 선비들은 모두 정철의 인품을 허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최영경이 가가호호 찾아다니면서 정철을 허여하지 못하게 설득한 것이 아닌데도, 정철은 이것을 실상 영경의 창도(倡導)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여겨 깊은 유감을 품고 있었다. 마침 역적의 옥사(獄事)가 일어나게 되자, 이를 이용하여 무함하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일을 만들어 내어 부도(不道)라는 이름을 씌워 옥에 잡아 가두고는 온갖 방법으로 곤욕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성상의 살피심이 매우 밝으셨고 공론(公論)이 민멸되지 않아서 마침내 애매한 일이라 하여 방출(放出)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철이 기필코 그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잡아 가두어 끝내 옥중에서 죽게 하였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宣祖實錄』 27년 5월 4일조).
□ 참고자료
『宣祖實錄』 26년~27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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