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99. 유영순(柳永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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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유영순(柳永詢, 1552~1632)의 자는 순지(詢之)이고 호는 졸암(拙庵) 또는 북천(北川)이며, 본관은 전주로 경성(京城)에 거주하였다. 그는 1552년(명종 7년)에 부사 연(挺)의 아들로 태어났다.
급문 : 유영순은 비록 직접 문하에 급문하지는 않았으나, 서원의 중건에 크게 기여하였고, 스스로 문인의 대열에 있다고 자처하였다.
과거 및 벼슬 : 1573년에 유영순(22세)은 식년 생원 제3등으로 합격하였고(『司馬榜目』), 28세(1579년)에는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32세(1583년) 4월 25일에 예문관 한림(藝文館翰林)으로 추천되었고(『宣祖實錄』 16년), 40세(1591년) 4월 16일에는 성균관 사성에 제수되었다(『宣祖實錄』 24년). 43세(1594년) 8월 8일에는 장령에 제수되었고, 11월 18일에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다(『宣祖實錄』 27년). 44세(1595년) 2월 20일에 승정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고(『宣祖實錄』 28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가속(家屬)을 도내에 유치, 경거망동하고 또 수령을 통솔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45세(1596년) 3월 7일에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고, 11월 17일에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제수되었으며, 12월 4일에 형조 참판이 되었다(『宣祖實錄』 29년).
50세(1601년) 2월 19일에는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고(『宣祖實錄』 34년), 56세(1607년) 5월 5일에는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6월 21일에 우윤이 되었으며, 12월 9일에 호조참판이 되었다(『宣祖實錄』 40년).
의병활동 :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유영순(46세)은 전란 중에 부친과 형을 잃고, 김시헌, 송순 등과 함께 사사로이 군량, 무기 등을 준비하여 장정 700여명을 모아 복수군을 조직하여 서울의 수성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52세(1603년) 4월 5일에 정사(政事)를 함에 있어 학교를 우선으로 하여 직접 교회(敎誨)하나 너무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친애(親愛)하지 않고 있다(『宣祖實錄』 36년)고 하였고, 55세(1606년) 12월 26일에는 경상 감사 유영순(柳永詢)이 다음과 같이 치계하였다.
‘도내(道內) 여러 고을이 선현을 위해 사우(祠宇)를 세워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고 그 곁에 강당(講堂)과 재사(齋舍)를 지어 선비들의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은 곳이 한둘이 아닙니다. 성주(星州)의 천곡서원(川谷書院)은 그곳에 이천(伊川), 운곡(雲谷)이란 지명이 있는 것을 인연으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위판(位版)을 봉안(奉安)하였고, 선산(善山)의 금오서원(金烏書院)은 야은선생(冶隱先生) 길재(吉再)가 살던 곳이고, 현풍(玄風)의 쌍계서원(雙溪書院)은 한훤선생(寒暄先生) 김굉필(金宏弼)이 살던 곳이고, 함양(咸陽)의 남계서원(藍溪書院)은 일두선생(一蠹先生) 정여창(鄭汝昌)이 살던 곳이라 하여 평시에 온 도내의 선비들이 힘을 합쳐 세우고서 조정에 아뢰자, 특별히 편액(扁額)을 하사했었는데, 불행히도 병화(兵火)에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지금 선비들이 각기 재력(財力)을 염출하여 지방 관아에서도 힘을 합쳐 도와줌으로써 옛날 모습대로 중건(重建)하여 신주를 모실 곳이 있게 되었으니 매우 가상한 일입니다. 그런데 전날 하사된 편액이 남아 있는 곳이 없어 중건하고서도 아직 서원만 있고 편액이 없으므로 국가에서 표장(表章)하여 높게 걸도록 한 뜻을 보여줄 수 없는 점이 매우 흠입니다. 조정에서 특별히 거듭 내리도록 하여 사문(斯文)을 빛나게 해 주신다면 더 없는 다행이겠습니다. 그 중에 남명선생(南冥先生)은 학행과 도덕이 전현(前賢)의 아름다움에 손색이 없으므로 선비들의 흠모도 전현들에 못지 않습니다. 평소에 진주(晋州) 덕산(德山)의 옛날 거처하던 곳 부근에 서원을 세웠었는데 역시 방화에 불타버렸던 것을 지금 중건하였으니 다른 서원의 예처럼 아울러 사액(賜額)하여 조정에서 문헌을 숭상하고 도덕을 높이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는데, 예조에 계하하였다. 예조의 계목에, ‘계하(啓下)를 점련합니다. 천곡(川谷)‧금오(金烏)‧쌍계(雙溪)‧남계(藍溪) 등 네 서원은 평소에 특별히 편액을 하사했었으니 편액 이름은 그것으로 쓰되, 본도로 하여금 고증해 계문하게 한 뒤에 특별히 거듭 하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조식의 학행은 전현들의 아름다움에 손색이 없을 뿐더러 지금 서원이 창설되었으니 다른 서원의 예대로 아울러 사액하도록 명하는 것이 문을 숭상하고 도를 높이는 뜻에 참으로 합당하나 은명(恩命)과 관계되니 상께서 재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윤허한다. 일찍이 이미 사액되었던 곳은 사액하고 새로 세운 곳에 대한 사액은 천천히 하도록 하라(『宣祖實錄』 39년)’
□ 참고자료
『宣祖實錄』 16년, 20년, 24년, 27년~30년, 34년~40년.
『宣祖修正實錄』 35년.
『光海君日記』 즉위년, 3년, 9년~10년.
『仁祖實錄』 6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17.
유영순(柳永詢, 1552~1632)의 자는 순지(詢之)이고 호는 졸암(拙庵) 또는 북천(北川)이며, 본관은 전주로 경성(京城)에 거주하였다. 그는 1552년(명종 7년)에 부사 연(挺)의 아들로 태어났다.
급문 : 유영순은 비록 직접 문하에 급문하지는 않았으나, 서원의 중건에 크게 기여하였고, 스스로 문인의 대열에 있다고 자처하였다.
과거 및 벼슬 : 1573년에 유영순(22세)은 식년 생원 제3등으로 합격하였고(『司馬榜目』), 28세(1579년)에는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32세(1583년) 4월 25일에 예문관 한림(藝文館翰林)으로 추천되었고(『宣祖實錄』 16년), 40세(1591년) 4월 16일에는 성균관 사성에 제수되었다(『宣祖實錄』 24년). 43세(1594년) 8월 8일에는 장령에 제수되었고, 11월 18일에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다(『宣祖實錄』 27년). 44세(1595년) 2월 20일에 승정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고(『宣祖實錄』 28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가속(家屬)을 도내에 유치, 경거망동하고 또 수령을 통솔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45세(1596년) 3월 7일에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고, 11월 17일에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제수되었으며, 12월 4일에 형조 참판이 되었다(『宣祖實錄』 29년).
50세(1601년) 2월 19일에는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고(『宣祖實錄』 34년), 56세(1607년) 5월 5일에는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6월 21일에 우윤이 되었으며, 12월 9일에 호조참판이 되었다(『宣祖實錄』 40년).
의병활동 :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유영순(46세)은 전란 중에 부친과 형을 잃고, 김시헌, 송순 등과 함께 사사로이 군량, 무기 등을 준비하여 장정 700여명을 모아 복수군을 조직하여 서울의 수성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52세(1603년) 4월 5일에 정사(政事)를 함에 있어 학교를 우선으로 하여 직접 교회(敎誨)하나 너무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친애(親愛)하지 않고 있다(『宣祖實錄』 36년)고 하였고, 55세(1606년) 12월 26일에는 경상 감사 유영순(柳永詢)이 다음과 같이 치계하였다.
‘도내(道內) 여러 고을이 선현을 위해 사우(祠宇)를 세워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고 그 곁에 강당(講堂)과 재사(齋舍)를 지어 선비들의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은 곳이 한둘이 아닙니다. 성주(星州)의 천곡서원(川谷書院)은 그곳에 이천(伊川), 운곡(雲谷)이란 지명이 있는 것을 인연으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위판(位版)을 봉안(奉安)하였고, 선산(善山)의 금오서원(金烏書院)은 야은선생(冶隱先生) 길재(吉再)가 살던 곳이고, 현풍(玄風)의 쌍계서원(雙溪書院)은 한훤선생(寒暄先生) 김굉필(金宏弼)이 살던 곳이고, 함양(咸陽)의 남계서원(藍溪書院)은 일두선생(一蠹先生) 정여창(鄭汝昌)이 살던 곳이라 하여 평시에 온 도내의 선비들이 힘을 합쳐 세우고서 조정에 아뢰자, 특별히 편액(扁額)을 하사했었는데, 불행히도 병화(兵火)에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지금 선비들이 각기 재력(財力)을 염출하여 지방 관아에서도 힘을 합쳐 도와줌으로써 옛날 모습대로 중건(重建)하여 신주를 모실 곳이 있게 되었으니 매우 가상한 일입니다. 그런데 전날 하사된 편액이 남아 있는 곳이 없어 중건하고서도 아직 서원만 있고 편액이 없으므로 국가에서 표장(表章)하여 높게 걸도록 한 뜻을 보여줄 수 없는 점이 매우 흠입니다. 조정에서 특별히 거듭 내리도록 하여 사문(斯文)을 빛나게 해 주신다면 더 없는 다행이겠습니다. 그 중에 남명선생(南冥先生)은 학행과 도덕이 전현(前賢)의 아름다움에 손색이 없으므로 선비들의 흠모도 전현들에 못지 않습니다. 평소에 진주(晋州) 덕산(德山)의 옛날 거처하던 곳 부근에 서원을 세웠었는데 역시 방화에 불타버렸던 것을 지금 중건하였으니 다른 서원의 예처럼 아울러 사액(賜額)하여 조정에서 문헌을 숭상하고 도덕을 높이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는데, 예조에 계하하였다. 예조의 계목에, ‘계하(啓下)를 점련합니다. 천곡(川谷)‧금오(金烏)‧쌍계(雙溪)‧남계(藍溪) 등 네 서원은 평소에 특별히 편액을 하사했었으니 편액 이름은 그것으로 쓰되, 본도로 하여금 고증해 계문하게 한 뒤에 특별히 거듭 하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조식의 학행은 전현들의 아름다움에 손색이 없을 뿐더러 지금 서원이 창설되었으니 다른 서원의 예대로 아울러 사액하도록 명하는 것이 문을 숭상하고 도를 높이는 뜻에 참으로 합당하나 은명(恩命)과 관계되니 상께서 재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윤허한다. 일찍이 이미 사액되었던 곳은 사액하고 새로 세운 곳에 대한 사액은 천천히 하도록 하라(『宣祖實錄』 39년)’
□ 참고자료
『宣祖實錄』 16년, 20년, 24년, 27년~30년, 34년~40년.
『宣祖修正實錄』 35년.
『光海君日記』 즉위년, 3년, 9년~10년.
『仁祖實錄』 6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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