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80. 전유룡(田有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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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전유룡(田有龍) 『덕천사우연원록』에 의하면, 전유룡은 어려서부터 외조(外祖)인 이제신(도구)을 따라 배운 후, 남명선생에게 출입하였고 성품이 개결하여 명리를 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中宗丙子年生(1516년)으로 ‘又出入先生之門 亟被獎詡’라 하여 中宗 11年(1516년)에 태어나서 남명선생의 생존시에 급문한 것으로 보이지만, 李濟臣(陶丘, 1510-1582)의 外孫이면서 도구로부터 학문을 배웠다(公幼從外祖李陶丘學)는 기록에서는 宣祖 9年(丙子, 1576년)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는 남명선생 사후에 급문한 것이 되므로 연도상의 불일치가 보인다(『덕천사우연원록』 상,
卷4, 문인속록, 「전유룡」조 참조).
의 자는 현경(見卿)이고 호는 호봉(蒿峯)이며 본관은 담양(潭陽)으로 의령(宜寧)에 거주하였다.
자굴산은 의령의 명망인데 그 산됨이 용이 꿈틀거리듯 맑은 기운이 어리어서 아름다움이 사람에게 모이니 호걸스런 선비가 그 사이에서 많이 나왔다. 전유룡 같은 이도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蒿峯精舍重建記」).
수학 및 교육 : 전유룡은 일찍이 외조부 이제신(도구)의 가르침을 입어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요결을 알았고, 성인이 되어서는 남명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의(義)를 공경하는 교훈에 종사하니 수컷 나는 물고기의 재주와 꼿꼿한 기운을 충족하는데에 이미 성숙되었다고 한다(「蒿峯精舍重建記」; 『덕천사우연원록』 상, 卷4, 문인속록, 「전유룡」).
의병활동 : 1592년(선조 25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며느리 사돈인 이광우(李光友)의 담략으로 초유사 김성일에게 천거하였고, 곽재우의 홍의의병 진영으로 가서 기획을 돕고 계책을 수립하여 화왕산성에서 적을 물리쳤다(「蒿峯精舍重建記」). 전후에 그 공으로 사헌부 감찰을 제수받았으니 『의령지』 「충훈편」과 『임진창의록』에 수록되어 있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宜寧樓亭錄』(1997).
「蒿峯精舍重建記」(丁酉).
『宜寧誌』.
『壬辰倡義錄』.
전유룡(田有龍) 『덕천사우연원록』에 의하면, 전유룡은 어려서부터 외조(外祖)인 이제신(도구)을 따라 배운 후, 남명선생에게 출입하였고 성품이 개결하여 명리를 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中宗丙子年生(1516년)으로 ‘又出入先生之門 亟被獎詡’라 하여 中宗 11年(1516년)에 태어나서 남명선생의 생존시에 급문한 것으로 보이지만, 李濟臣(陶丘, 1510-1582)의 外孫이면서 도구로부터 학문을 배웠다(公幼從外祖李陶丘學)는 기록에서는 宣祖 9年(丙子, 1576년)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는 남명선생 사후에 급문한 것이 되므로 연도상의 불일치가 보인다(『덕천사우연원록』 상,
卷4, 문인속록, 「전유룡」조 참조).
의 자는 현경(見卿)이고 호는 호봉(蒿峯)이며 본관은 담양(潭陽)으로 의령(宜寧)에 거주하였다.
자굴산은 의령의 명망인데 그 산됨이 용이 꿈틀거리듯 맑은 기운이 어리어서 아름다움이 사람에게 모이니 호걸스런 선비가 그 사이에서 많이 나왔다. 전유룡 같은 이도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蒿峯精舍重建記」).
수학 및 교육 : 전유룡은 일찍이 외조부 이제신(도구)의 가르침을 입어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요결을 알았고, 성인이 되어서는 남명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의(義)를 공경하는 교훈에 종사하니 수컷 나는 물고기의 재주와 꼿꼿한 기운을 충족하는데에 이미 성숙되었다고 한다(「蒿峯精舍重建記」; 『덕천사우연원록』 상, 卷4, 문인속록, 「전유룡」).
의병활동 : 1592년(선조 25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며느리 사돈인 이광우(李光友)의 담략으로 초유사 김성일에게 천거하였고, 곽재우의 홍의의병 진영으로 가서 기획을 돕고 계책을 수립하여 화왕산성에서 적을 물리쳤다(「蒿峯精舍重建記」). 전후에 그 공으로 사헌부 감찰을 제수받았으니 『의령지』 「충훈편」과 『임진창의록』에 수록되어 있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宜寧樓亭錄』(1997).
「蒿峯精舍重建記」(丁酉).
『宜寧誌』.
『壬辰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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