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71. 박순(朴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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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박순(朴淳, 1523∼1589)의 자는 화숙(和叔)이고 호는 젊어서 청하자(靑霞子)로 하였다가 나중에는 사암(思菴)이라고 고쳤으며, 본관은 충주(忠州)로 경성(京城)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3년(중종 18년) 10월에 우윤(右尹)의 벼슬을 지낸 충주인(忠州人) 아버지 우(祐)와 어머니(김씨) 사이에 나주(羅州)의 시골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는 화담(花潭, 徐敬德)선생의 문인이기도 하며, 그가 남긴 문집은 『사암집(思菴集)』 4권 2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박순은 태어나면서 남다른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 아이들과 놀이를 할 때도 항시 읍양진퇴(揖讓進退)의 형식을 갖추었다. 8세(1530년)에는 이미 시(詩)를 지어 경물(景物)을 읊으니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웃의 훈장(訓長)으로부터 스승 노릇하기 어렵다는 경탄을 자아내게 하였고, 부친에게서는 그의 글재주에 무릎을 꿇어야겠다는 칭찬을 들은 바 있었다.
처음에는 화담선생으로부터 배우고 성리설(性理說)을 들었다. 그리고 퇴계선생을 사사하게 되었는데, 그는 일찍부터 왕래하면서 출처(出處)의 뜻을 논함에 항상 일컬어지기를 “박모(朴某)와 함께 상대하면 밝기가 한 줄기 맑은 얼음 같아 정신과 혼이 점점 상쾌해 진다”고 하였다.
18세(1540년)에 홍인우(洪仁祐), 허엽(許曄), 남언경(南彦經) 등과 더불어 화담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수업을 하였다.
25세(1547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그 형 박개(朴漑)와 더불어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례를 극진히 하였다. 탈상 후에는 입산하여 독서에 전념하였다.
급문 : 박순은 늦게 남명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경의지학(敬義之學)을 베웠는데, 남명선생이 서울에 상경하였을 때 시종하여 의문나는 것을 질의하였고, 남명선생이 돌아올 때에는 한강에서 배웅하였다. 남명선생의 사후 애시(哀詩) 1수를 남겼다(『德川師友淵源錄』, 卷4, 「門人續集」 朴淳).
과거 및 벼슬 : 박순은 18세(1540년)에 진사(進士; 식년 진사 3등)가 되었다.
그는 31세(1553년) 가을에 명종(明宗)이 정시(庭試)를 개설하고 친히 일경(一經)씩을 시험하였는데, 그가 『중용』을 변별해석하는 것이 정확하고 응대(應對)가 민첩해서 장원급제하고 성균관 전적을 제수하였으니, 이로부터 그의 관료생활이 시작되었다. 호당(湖堂)에서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허여받았다. 동년 9월 5일에 공조좌랑이 되었다(『明宗實錄』 8년). 32세(1554년) 11월 2일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明宗實錄』 9년), 36세(1558년)에는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정철‧이산해 등과 사가독서(賜暇讀書)하며 강론하기도 하였다. 39세(1561년)에는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재직할 때, 마침 을사사화를 일으켰던 임백령(林百齡)의 시호가 거론되자 박순이 이를 폄하하여 ‘공소(恭昭)’라 진주(進奏)함으로써 당대의 실권자였던 윤원형과 대립하게 되었으니, 평소의 의리정신과 강개(慷慨)한 언론이 이와 같았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한산 군수 박순은 자품이 청고하고 지기가 강개하였다. 천성적으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였고 남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내며 문을 닫고 자신을 지켰다. 과거에 급제한 이래 10년 동안 한 번도 권귀의 문에 발을 디딘 적이 없었다. 생각과 뜻이 고고(孤高)하여 항상 이 세상의 밖에 있었으며 언론이 강개하여 세상의 추세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히 경모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다. 그런데 끝내는 이런 훌륭한 점 때문에 배척을 당하게 된 것이다.
2월 6일에 명종이 사정전에서 박순에게 한산 군수(韓山郡守)를 제수하면서 하교하기를, ‘오늘날 수령 중에는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할 만한 자가 없다. 그대는 부임하거든 백성을 사랑하고 폐해를 제거하도록 하고 법을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라’는 명을 듣고 물러갔다.
처음에 이양이 박순을 강제로 불러 오려고 세 번이나 연회를 베풀고 불렀으나 박순은 일체 사양하고 참석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이양은 자못 원망하는 말을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박순을 위해 위태롭게 여겼으나 박순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시호(諡號)를 짓는 문제로 화가 일어나 일이 예측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박순이 아무런 동요없이 개의하는 바가 없자 사람들은 그의 절조에 탄복하였다. 박순은 ‘일찍이 한문공(韓文公)의 다행히 대절(大節)을 잃지 않아 선인(先人)을 지하에서 만나뵐 수 있다면 족하겠다’는 말과, 한위공(韓魏公)의 ‘부귀는 얻기 쉬우나 명절은 보전하기 어렵다’는 말을 읊조리며 자신을 갈고 닦았는데, 이 때문에 그의 절개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가 외직(外職)으로 전보(轉補)되어 나가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떠나감을 애석하게 여겼다(『明宗實錄』 17년).
41세(1563년)에는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에 배수(拜受)되니 이 때 순회세자(順懷世子)의 「만사(挽辭)」를 지었고, 43세(1565년) 5월 8일 대사간(大司諫)이 되어서는 양사(兩司)와 함께 윤원형의 죄를 논하고 탄핵하여 마침내 파출(罷黜)시켰으니, 이로부터 사림이 크게 일어나 그를 믿고 추종함으로써 사림의 종주가 되었다. 박순은 천성이 강직하고 간고(簡古)하며 억세고 사나운 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 문필(文筆)의 재간이 있어 시부(詩賦)에 능하였는데 당시에 제일로 일컬어졌다. 평소 집에 있을 적에 권세 있는 외척들의 의롭지 못한 일을 들으면 개탄하여 마지않고 말과 얼굴빛에 나타내기까지 하였으며, 남의 착한 일을 들으면 그 마음에 좋아하여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도 손을 대하듯 공경하니 사림(士林)이 어질게 여겼다(『明宗實錄』 20년). 46세(1568년)에는 중국의 사신 구희직(歐希稷)이 공헌대왕(恭憲大王; 明宗)의 시제(諡祭)로 입경(入京)하여 박순이 접반사(接伴使)가 되었는데, 구희직이 그의 단아한 자용(姿容)과 시를 대하고는 “송대(宋代)의 인물이요, 당대(唐代)의 시조(詩調)”라고 상찬(賞讚)하였다.
50세(1572년)에는 우의정(右議政)에 보임(補任)되어 등극사(登極使)로 연경(燕京)에 입조(入朝)하였을 때, 외국의 진주자(進奏者)를 내문(來門)으로 들어오도록 한 전례(前例)를 논박하고 끝내 정문으로 출입하는 제도를 정착케 했던 데서도, 그의 충용강직(忠勇剛直)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57세(1579년)에는 영의정(領議政)으로 승임(陞任)되니, 이에 힘입어 사림이 대거 정계에 진출하였다. 그는 14년간 영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현량(賢良)한 인재를 적극 천거하였고, 특히 이이‧성혼과는 지기(志氣)를 같이하던 막역지교를 맺었다. 동서의 당쟁이 격심할 무렵 이이가 탄핵을 당하자 성혼이 상소하고, 박순이 변호하니, 논박하는 자들이 “순(淳)은 곧 이(珥)요, 이(珥)가 곧 혼(渾)이니,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하면서 배척하였다. 양사(兩司)에서는 심의겸 등 13인을 당적으로 엮고 박순을 그 우두머리로 지목하였다.
64세(1586년)에는 관직을 사퇴하고 강호(江湖)로 돌아왔고, 67세(1589년) 12월에는 홍문과 대제학에 재임중이던 박순은 의정부와 동료 문인들의 권고로 퇴계선생의 「지문(誌文)」과 「행략(行略)」을 지어 보냈다.
향사 : 박순이 1589년(선조 22년)에 세상을 떠난 후, 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과 영평의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다.
□ 참고자료
『燕山君日記』 8년~10년.
『中宗實錄』 4년~5년, 14년, 16년, 25년, 34년, 36년.
『仁宗實錄』 1년.
『明宗實錄』 5년, 8년~11년, 13년~22년.
『宣祖實錄』 1년~2년, 4년~11년, 13년~14년, 16년~22년, 26년~28년, 30년, 32년, 34년, 36년~37년, 39년, 41년.
『宣祖修正實錄』 즉위년~9년, 11년~14년, 16년~20년, 22년~23년, 37년.
『光海君日記』 즉위년~2년, 5년, 8년, 10년, 13년.
『仁祖實錄』 2년, 9년~10년, 13년, 16년, 19년, 21년, 26년.
『孝宗實錄』 즉위년, 4년, 8년~10년.
『顯宗實錄』 즉위년, 3년, 5년~10년, 13년~14년.
『顯宗改修實錄』 즉위년, 3년, 5년~11년, 13년, 14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朴 淳, 『思菴集』 4권(『韓國文集叢刊』 38), 民族文化推進會, 1990.
『民族文化大百科辭典』 4‧8‧9‧10‧16‧17‧24‧25.
李昌炅, 「思菴 朴淳論」 『漢陽語文硏究』 5. 漢陽大學校 漢陽語文學會, 1988.
任芳姸, 「思菴 朴淳의 詩文學 硏究」, 誠信女子大學校 敎育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91.
金盛年, 「思菴 朴淳의 詩世界」 『漢文學硏究』 7, 啓明漢文學硏究會, 1991.
裵晟熹, 「思菴 朴淳의 詩文學」, 東國大學校 敎育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92.
박순(朴淳, 1523∼1589)의 자는 화숙(和叔)이고 호는 젊어서 청하자(靑霞子)로 하였다가 나중에는 사암(思菴)이라고 고쳤으며, 본관은 충주(忠州)로 경성(京城)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3년(중종 18년) 10월에 우윤(右尹)의 벼슬을 지낸 충주인(忠州人) 아버지 우(祐)와 어머니(김씨) 사이에 나주(羅州)의 시골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는 화담(花潭, 徐敬德)선생의 문인이기도 하며, 그가 남긴 문집은 『사암집(思菴集)』 4권 2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박순은 태어나면서 남다른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 아이들과 놀이를 할 때도 항시 읍양진퇴(揖讓進退)의 형식을 갖추었다. 8세(1530년)에는 이미 시(詩)를 지어 경물(景物)을 읊으니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웃의 훈장(訓長)으로부터 스승 노릇하기 어렵다는 경탄을 자아내게 하였고, 부친에게서는 그의 글재주에 무릎을 꿇어야겠다는 칭찬을 들은 바 있었다.
처음에는 화담선생으로부터 배우고 성리설(性理說)을 들었다. 그리고 퇴계선생을 사사하게 되었는데, 그는 일찍부터 왕래하면서 출처(出處)의 뜻을 논함에 항상 일컬어지기를 “박모(朴某)와 함께 상대하면 밝기가 한 줄기 맑은 얼음 같아 정신과 혼이 점점 상쾌해 진다”고 하였다.
18세(1540년)에 홍인우(洪仁祐), 허엽(許曄), 남언경(南彦經) 등과 더불어 화담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수업을 하였다.
25세(1547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그 형 박개(朴漑)와 더불어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례를 극진히 하였다. 탈상 후에는 입산하여 독서에 전념하였다.
급문 : 박순은 늦게 남명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경의지학(敬義之學)을 베웠는데, 남명선생이 서울에 상경하였을 때 시종하여 의문나는 것을 질의하였고, 남명선생이 돌아올 때에는 한강에서 배웅하였다. 남명선생의 사후 애시(哀詩) 1수를 남겼다(『德川師友淵源錄』, 卷4, 「門人續集」 朴淳).
과거 및 벼슬 : 박순은 18세(1540년)에 진사(進士; 식년 진사 3등)가 되었다.
그는 31세(1553년) 가을에 명종(明宗)이 정시(庭試)를 개설하고 친히 일경(一經)씩을 시험하였는데, 그가 『중용』을 변별해석하는 것이 정확하고 응대(應對)가 민첩해서 장원급제하고 성균관 전적을 제수하였으니, 이로부터 그의 관료생활이 시작되었다. 호당(湖堂)에서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허여받았다. 동년 9월 5일에 공조좌랑이 되었다(『明宗實錄』 8년). 32세(1554년) 11월 2일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明宗實錄』 9년), 36세(1558년)에는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정철‧이산해 등과 사가독서(賜暇讀書)하며 강론하기도 하였다. 39세(1561년)에는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재직할 때, 마침 을사사화를 일으켰던 임백령(林百齡)의 시호가 거론되자 박순이 이를 폄하하여 ‘공소(恭昭)’라 진주(進奏)함으로써 당대의 실권자였던 윤원형과 대립하게 되었으니, 평소의 의리정신과 강개(慷慨)한 언론이 이와 같았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한산 군수 박순은 자품이 청고하고 지기가 강개하였다. 천성적으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였고 남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내며 문을 닫고 자신을 지켰다. 과거에 급제한 이래 10년 동안 한 번도 권귀의 문에 발을 디딘 적이 없었다. 생각과 뜻이 고고(孤高)하여 항상 이 세상의 밖에 있었으며 언론이 강개하여 세상의 추세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히 경모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다. 그런데 끝내는 이런 훌륭한 점 때문에 배척을 당하게 된 것이다.
2월 6일에 명종이 사정전에서 박순에게 한산 군수(韓山郡守)를 제수하면서 하교하기를, ‘오늘날 수령 중에는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할 만한 자가 없다. 그대는 부임하거든 백성을 사랑하고 폐해를 제거하도록 하고 법을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라’는 명을 듣고 물러갔다.
처음에 이양이 박순을 강제로 불러 오려고 세 번이나 연회를 베풀고 불렀으나 박순은 일체 사양하고 참석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이양은 자못 원망하는 말을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박순을 위해 위태롭게 여겼으나 박순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시호(諡號)를 짓는 문제로 화가 일어나 일이 예측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박순이 아무런 동요없이 개의하는 바가 없자 사람들은 그의 절조에 탄복하였다. 박순은 ‘일찍이 한문공(韓文公)의 다행히 대절(大節)을 잃지 않아 선인(先人)을 지하에서 만나뵐 수 있다면 족하겠다’는 말과, 한위공(韓魏公)의 ‘부귀는 얻기 쉬우나 명절은 보전하기 어렵다’는 말을 읊조리며 자신을 갈고 닦았는데, 이 때문에 그의 절개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가 외직(外職)으로 전보(轉補)되어 나가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떠나감을 애석하게 여겼다(『明宗實錄』 17년).
41세(1563년)에는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에 배수(拜受)되니 이 때 순회세자(順懷世子)의 「만사(挽辭)」를 지었고, 43세(1565년) 5월 8일 대사간(大司諫)이 되어서는 양사(兩司)와 함께 윤원형의 죄를 논하고 탄핵하여 마침내 파출(罷黜)시켰으니, 이로부터 사림이 크게 일어나 그를 믿고 추종함으로써 사림의 종주가 되었다. 박순은 천성이 강직하고 간고(簡古)하며 억세고 사나운 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 문필(文筆)의 재간이 있어 시부(詩賦)에 능하였는데 당시에 제일로 일컬어졌다. 평소 집에 있을 적에 권세 있는 외척들의 의롭지 못한 일을 들으면 개탄하여 마지않고 말과 얼굴빛에 나타내기까지 하였으며, 남의 착한 일을 들으면 그 마음에 좋아하여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도 손을 대하듯 공경하니 사림(士林)이 어질게 여겼다(『明宗實錄』 20년). 46세(1568년)에는 중국의 사신 구희직(歐希稷)이 공헌대왕(恭憲大王; 明宗)의 시제(諡祭)로 입경(入京)하여 박순이 접반사(接伴使)가 되었는데, 구희직이 그의 단아한 자용(姿容)과 시를 대하고는 “송대(宋代)의 인물이요, 당대(唐代)의 시조(詩調)”라고 상찬(賞讚)하였다.
50세(1572년)에는 우의정(右議政)에 보임(補任)되어 등극사(登極使)로 연경(燕京)에 입조(入朝)하였을 때, 외국의 진주자(進奏者)를 내문(來門)으로 들어오도록 한 전례(前例)를 논박하고 끝내 정문으로 출입하는 제도를 정착케 했던 데서도, 그의 충용강직(忠勇剛直)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57세(1579년)에는 영의정(領議政)으로 승임(陞任)되니, 이에 힘입어 사림이 대거 정계에 진출하였다. 그는 14년간 영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현량(賢良)한 인재를 적극 천거하였고, 특히 이이‧성혼과는 지기(志氣)를 같이하던 막역지교를 맺었다. 동서의 당쟁이 격심할 무렵 이이가 탄핵을 당하자 성혼이 상소하고, 박순이 변호하니, 논박하는 자들이 “순(淳)은 곧 이(珥)요, 이(珥)가 곧 혼(渾)이니,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하면서 배척하였다. 양사(兩司)에서는 심의겸 등 13인을 당적으로 엮고 박순을 그 우두머리로 지목하였다.
64세(1586년)에는 관직을 사퇴하고 강호(江湖)로 돌아왔고, 67세(1589년) 12월에는 홍문과 대제학에 재임중이던 박순은 의정부와 동료 문인들의 권고로 퇴계선생의 「지문(誌文)」과 「행략(行略)」을 지어 보냈다.
향사 : 박순이 1589년(선조 22년)에 세상을 떠난 후, 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과 영평의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다.
□ 참고자료
『燕山君日記』 8년~10년.
『中宗實錄』 4년~5년, 14년, 16년, 25년, 34년, 36년.
『仁宗實錄』 1년.
『明宗實錄』 5년, 8년~11년, 13년~22년.
『宣祖實錄』 1년~2년, 4년~11년, 13년~14년, 16년~22년, 26년~28년, 30년, 32년, 34년, 36년~37년, 39년, 41년.
『宣祖修正實錄』 즉위년~9년, 11년~14년, 16년~20년, 22년~23년, 37년.
『光海君日記』 즉위년~2년, 5년, 8년, 10년, 13년.
『仁祖實錄』 2년, 9년~10년, 13년, 16년, 19년, 21년, 26년.
『孝宗實錄』 즉위년, 4년, 8년~10년.
『顯宗實錄』 즉위년, 3년, 5년~10년, 13년~14년.
『顯宗改修實錄』 즉위년, 3년, 5년~11년, 13년, 14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朴 淳, 『思菴集』 4권(『韓國文集叢刊』 38), 民族文化推進會, 1990.
『民族文化大百科辭典』 4‧8‧9‧10‧16‧17‧24‧25.
李昌炅, 「思菴 朴淳論」 『漢陽語文硏究』 5. 漢陽大學校 漢陽語文學會, 1988.
任芳姸, 「思菴 朴淳의 詩文學 硏究」, 誠信女子大學校 敎育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91.
金盛年, 「思菴 朴淳의 詩世界」 『漢文學硏究』 7, 啓明漢文學硏究會, 1991.
裵晟熹, 「思菴 朴淳의 詩文學」, 東國大學校 敎育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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