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44. 곽재우(郭再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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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의 자는 계수(季綬)이고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며, 본관은 포산(苞山)으로 의령(宜寧)에 거주하였다. 시호(諡號)는 충익공(忠翼公)이다. 그는 1552년(명종 7년)에 아버지 월(越)의 아들로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망우당집(忘憂堂集)』 5권 3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곽재우는 14세(1565년)에 『춘추전』을 들고 계부(季父)인 참의공(參議公)에게 가서 가르쳐 주기를 청함에 참의공은 ‘네가 스스로 능히 이미 투철하게 이해하고 있는데, 굳이 나의 가르침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곽재우는 마음을 가다듬고 혼자서 『춘추전』을 깊이 연구하였으니 그의 학문은 대개 이 『춘추전』을 근본으로 하였다. 15세(1566년)에 의령의 자굴산(闍窟山)에 들어가 책을 읽음에 『제자백가』에 능통하였다. 19세(1570년)에 학문을 닦는 여가에 활쏘고, 말 몰고, 글씨 쓰고, 셈하는 재주를 익혔으며, 병법에 관한 책들도 모두 통달하였다.
27세(1578년) 가을 8월에는 부친께서 사신으로 중국 북경에 들어갔을 때 곽재우는 부친을 모시고 함께 갔는데, 그 때 관상을 보는 사람이 곽재우를 보고 이상히 여기면서 말하되, ‘뒷날 반드시 큰 사람이 되어 이름을 천하에 떨칠 것’이라고 하였다. 훗날 임진왜란을 당하여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으므로 명성이 중국과 일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명나라의 황제는 책문(策文)을 보내와 위문을 하면서, ‘조선이 작은 나라이지만 오히려 곽재우와 같은 명장도 있도다. 천하에 [그와 같은] 장수의 재능을 갖춘 사람이 있음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56세(1607년) 정월 27일에는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이 배를 타고 와서 방문하였다. 그 다음날 용화산(龍華山) 아래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64세(1615년)에는 남명선생의 관작(官爵)과 시호(諡號)를 의령현(宜寧縣)의 관아(官衙)에서 맞이하였다. 남명선생의 아들 조차석(曺次石)이 당시 의령현감으로 있었기 때문에 의령현의 관아에서 분황례(焚黃禮)를 치루었는데, 그가 가서 참관하였다.
과거 및 벼슬 : 곽재우는 34세(1585년)에 별시의 정시(庭試) 제2등으로 합격하였는데, 그 제목은 「당태종교사전정론(唐太宗敎射殿庭論)」이었다. 그러나 합격자 명단을 방(榜)에 붙인 지 며칠만에 임금으로부터 합격 취소의 명령이 내려졌다. 왜냐하면 곽재우가 제출한 논문 가운데 시의에 저촉되는 말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곽재우는 49세(1600년) 봄에 병으로 인해 임무를 교체해 주기를 청하는 사직소를 올리고 귀환하였는데, 이 때의 글이 대사헌의 탄핵을 받아 영암군(靈岩郡)에 부처(付處)되어 50세(1601년)까지 적소에 있었다. 57세(1608년) 2월 초2일에는 선조대왕이 승하하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였다. 그는 「토역소(討逆疏)」, 「척전은소(斥全恩疏)」 등을 올렸다. 58세(1609년)에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삼도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중흥삼책소(中興三策疏)」, 「진시폐오사」를 상소하였다. 62세(1613년)에는 영창대군을 구하는 소(疏)를 올렸다.
강학 : 곽재우는 30세(1581년)에 이대기, 이대약(李大約), 이종영, 성여신 등과 더불어 서로 강마하였고(『浮査集』), 31세(1582년)에 자굴사에서 성여신, 이대기와 더불어 강마하면서 겨울을 지냈다(『浮査集』). 38세(1589년)에는 의령현(宜寧縣) 동기강(東岐江)가에 있는 돈지강사(遯池江舍)를 완성하였다. 그는 부친상을 마친 다음 과거를 그만두고 여기서 낚시를 즐기며 일생을 보내려고 하였다.
의병활동 : 1592년(선조 25년) 4월에 왜란이 일어나자 모든 고을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곽재우는 현풍으로 가서 3대 선영(先瑩)의 봉분을 낮추어 평분(平墳)으로 고쳤다. 이는 그가 왜적토벌에 참전하게 되면 왜적들이 그 보복으로 조상의 분묘를 해롭게 할까를 미리 염려하여 후환을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 계모 허씨(許氏)와 형제들이 난리를 피하여 비슬산(琵瑟山)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그는 그 곳이 난리를 피할만한 지역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깊은 골짜기에서 지내도록 했다. 그렇게 한 다음 4월 22일에는 ‘왜적토벌로써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맹서를 가묘(家廟)에 아뢰고 전 재산을 기울여 장사(壯士)들을 모집하고, 칼을 잡고 일어나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란 기치를 내걸었다. 전투를 치룸에 대적할 이가 없게 되자, 사방에서 호응하여 의병(義兵)이 연달아 일어났다.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 형조정랑(刑曹正郞)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0월에 조방장(助防將)에 승진되었다. 이 때 「상초유사(上招諭使)」, 「통유도내열읍문(通諭道內列邑文)」, 「창의시자명소(倡義時自明疏)」 등을 지었다. 이 해에 이대기가 전치원과 더불어 향병을 모아 그와 합세하였다(『雪壑先生文集』).
43세(1594년)에 성주목사로서 악견산성(岳堅山城)을 수리하였다. 악견산성은 삼가(三嘉)에 있었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산성을 수리함이 급선무임을 의결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은 곽재우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 주관할 수 있도록 주청하였다. 정월 20일 김덕령(金德齡)과 서신(「답김장군서(答金將軍書)」)을 교환하여 악견산성을 수축, 수성하였고, 명군(明軍)의 영남 진주(進駐)를 반대하였다.
46세(1596년)에는 방어사(防禦使)로서 새로 현풍에 있는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쌓았다. 성이 완성되기 전에 왜적들이 다시 움직이려는 기세가 있자, 8월에 창녕(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수비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왜적이 군사를 이끌고 크게 쳐들어 왔다. 8월 29일 계모 허씨가 성안에서 별세함에 곽재우가 시신을 모시고 성밖으로 나와 임시로 가태리(嘉泰里)에 있는 비슬산에 장례를 치루고 적군을 피해 강원도 울진현으로 갔다.
정유재란(1597년) 때에는 화왕산성을 굳게 지켜 밀양, 창녕, 영산, 현풍 등지를 안전하게 지켰다.
51세(1602년)에 석방되어 비슬산에 들어가 솔잎을 먹으면서 곡식음식을 물리쳤다. 창암강(滄巖江)가에 정자를 지었다. 창암강은 영산현(靈山縣) 남쪽에 있는데 선생이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즐겨하여 강가에 정자를 짓고 망우(忘憂)라는 현판을 걸어 만년에 거처할 곳으로 삼았다.
향사 : 곽재우는 1617년(광해군 9년) 66세 봄에 창증(脹症)을 앓게 되어 날로 위독해졌으나 침(緘)이나 약(藥)을 쓰지 못하게 하고 동년 4월 10일에 강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사우(祠宇)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년)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龍蛇應募錄』.
『火旺入城同苦錄』.
『龍蛇日記』.
『懲毖錄』.
『亂中雜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3·7·15.
郭再祐, 『忘憂集』 5권(『韓國文集叢刊』 58), 民族文化推進會, 1990.
郭再祐, 『忘憂堂先生文集(國譯)』 5권, 1996.
郭再祐, 『忘憂堂全書』 5권, 忘憂堂紀念事業會, 1987.
梁銀容, 「忘憂堂 郭再祐의 養生思想」, 『韓國道敎思想硏究叢書』 Ⅴ, 1991.
李章熙, 「忘憂堂 郭再祐의 義兵活動」, 『南冥學硏究』 2,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2.
洪瑀欽, 「嶺南儒學과 鶴峯·忘憂堂의 壬亂對應」, 『漢文學論集』 12, 檀國漢文學會, 1994.
許昌式, 「忘憂堂의 護國精神의 再照明」, 忘憂堂郭再祐先生 忠義精神學術發表會, 南冥學釜山硏究院, 1995.
崔錫起, 「先生의 節義精神」, 忘憂堂郭再祐先生 忠義精神學術發表會, 南冥學釜山硏究院, 1995.
梁銀容, 「忘憂堂 郭再祐의 思想」, 忘憂堂郭再祐先生 忠義精神學術發表會, 南冥學釜山硏究院, 1995.
金康植, 「忘憂堂 郭再祐의 義兵活動과 政治的 役割」, 忘憂堂郭再祐先生 忠義精神學術發表會, 南冥學釜山硏究院, 1995.
李樹健, 「忘憂堂 郭再祐 義兵活動의 社會·經濟的 基盤」, 『南冥學硏究』 5,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5.
金周漢, 「忘憂堂 文學의 自由追求 試論」, 『南冥學硏究』 5,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5.
金康植, 「忘憂堂 郭再祐의 義兵活動과 政治的 役割」, 『南冥學硏究』 5,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5.
崔錫起, 「忘憂堂 郭再祐의 節義精神」, 『南冥學硏究』 6,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6.
朴英鎬, 「忘憂堂 郭再祐」, 『南冥院報』 6, 南冥學硏究院, 1997.
郭敬烈, 「壬辰嶺南忠義錄」, 『壬辰嶺南義兵史』, 壬亂護國嶺南忠義壇保存會, 2001. 4.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의 자는 계수(季綬)이고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며, 본관은 포산(苞山)으로 의령(宜寧)에 거주하였다. 시호(諡號)는 충익공(忠翼公)이다. 그는 1552년(명종 7년)에 아버지 월(越)의 아들로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망우당집(忘憂堂集)』 5권 3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곽재우는 14세(1565년)에 『춘추전』을 들고 계부(季父)인 참의공(參議公)에게 가서 가르쳐 주기를 청함에 참의공은 ‘네가 스스로 능히 이미 투철하게 이해하고 있는데, 굳이 나의 가르침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곽재우는 마음을 가다듬고 혼자서 『춘추전』을 깊이 연구하였으니 그의 학문은 대개 이 『춘추전』을 근본으로 하였다. 15세(1566년)에 의령의 자굴산(闍窟山)에 들어가 책을 읽음에 『제자백가』에 능통하였다. 19세(1570년)에 학문을 닦는 여가에 활쏘고, 말 몰고, 글씨 쓰고, 셈하는 재주를 익혔으며, 병법에 관한 책들도 모두 통달하였다.
27세(1578년) 가을 8월에는 부친께서 사신으로 중국 북경에 들어갔을 때 곽재우는 부친을 모시고 함께 갔는데, 그 때 관상을 보는 사람이 곽재우를 보고 이상히 여기면서 말하되, ‘뒷날 반드시 큰 사람이 되어 이름을 천하에 떨칠 것’이라고 하였다. 훗날 임진왜란을 당하여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으므로 명성이 중국과 일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명나라의 황제는 책문(策文)을 보내와 위문을 하면서, ‘조선이 작은 나라이지만 오히려 곽재우와 같은 명장도 있도다. 천하에 [그와 같은] 장수의 재능을 갖춘 사람이 있음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56세(1607년) 정월 27일에는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이 배를 타고 와서 방문하였다. 그 다음날 용화산(龍華山) 아래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64세(1615년)에는 남명선생의 관작(官爵)과 시호(諡號)를 의령현(宜寧縣)의 관아(官衙)에서 맞이하였다. 남명선생의 아들 조차석(曺次石)이 당시 의령현감으로 있었기 때문에 의령현의 관아에서 분황례(焚黃禮)를 치루었는데, 그가 가서 참관하였다.
과거 및 벼슬 : 곽재우는 34세(1585년)에 별시의 정시(庭試) 제2등으로 합격하였는데, 그 제목은 「당태종교사전정론(唐太宗敎射殿庭論)」이었다. 그러나 합격자 명단을 방(榜)에 붙인 지 며칠만에 임금으로부터 합격 취소의 명령이 내려졌다. 왜냐하면 곽재우가 제출한 논문 가운데 시의에 저촉되는 말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곽재우는 49세(1600년) 봄에 병으로 인해 임무를 교체해 주기를 청하는 사직소를 올리고 귀환하였는데, 이 때의 글이 대사헌의 탄핵을 받아 영암군(靈岩郡)에 부처(付處)되어 50세(1601년)까지 적소에 있었다. 57세(1608년) 2월 초2일에는 선조대왕이 승하하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였다. 그는 「토역소(討逆疏)」, 「척전은소(斥全恩疏)」 등을 올렸다. 58세(1609년)에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삼도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중흥삼책소(中興三策疏)」, 「진시폐오사」를 상소하였다. 62세(1613년)에는 영창대군을 구하는 소(疏)를 올렸다.
강학 : 곽재우는 30세(1581년)에 이대기, 이대약(李大約), 이종영, 성여신 등과 더불어 서로 강마하였고(『浮査集』), 31세(1582년)에 자굴사에서 성여신, 이대기와 더불어 강마하면서 겨울을 지냈다(『浮査集』). 38세(1589년)에는 의령현(宜寧縣) 동기강(東岐江)가에 있는 돈지강사(遯池江舍)를 완성하였다. 그는 부친상을 마친 다음 과거를 그만두고 여기서 낚시를 즐기며 일생을 보내려고 하였다.
의병활동 : 1592년(선조 25년) 4월에 왜란이 일어나자 모든 고을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곽재우는 현풍으로 가서 3대 선영(先瑩)의 봉분을 낮추어 평분(平墳)으로 고쳤다. 이는 그가 왜적토벌에 참전하게 되면 왜적들이 그 보복으로 조상의 분묘를 해롭게 할까를 미리 염려하여 후환을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 계모 허씨(許氏)와 형제들이 난리를 피하여 비슬산(琵瑟山)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그는 그 곳이 난리를 피할만한 지역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깊은 골짜기에서 지내도록 했다. 그렇게 한 다음 4월 22일에는 ‘왜적토벌로써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맹서를 가묘(家廟)에 아뢰고 전 재산을 기울여 장사(壯士)들을 모집하고, 칼을 잡고 일어나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란 기치를 내걸었다. 전투를 치룸에 대적할 이가 없게 되자, 사방에서 호응하여 의병(義兵)이 연달아 일어났다.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 형조정랑(刑曹正郞)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0월에 조방장(助防將)에 승진되었다. 이 때 「상초유사(上招諭使)」, 「통유도내열읍문(通諭道內列邑文)」, 「창의시자명소(倡義時自明疏)」 등을 지었다. 이 해에 이대기가 전치원과 더불어 향병을 모아 그와 합세하였다(『雪壑先生文集』).
43세(1594년)에 성주목사로서 악견산성(岳堅山城)을 수리하였다. 악견산성은 삼가(三嘉)에 있었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산성을 수리함이 급선무임을 의결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은 곽재우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 주관할 수 있도록 주청하였다. 정월 20일 김덕령(金德齡)과 서신(「답김장군서(答金將軍書)」)을 교환하여 악견산성을 수축, 수성하였고, 명군(明軍)의 영남 진주(進駐)를 반대하였다.
46세(1596년)에는 방어사(防禦使)로서 새로 현풍에 있는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쌓았다. 성이 완성되기 전에 왜적들이 다시 움직이려는 기세가 있자, 8월에 창녕(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수비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왜적이 군사를 이끌고 크게 쳐들어 왔다. 8월 29일 계모 허씨가 성안에서 별세함에 곽재우가 시신을 모시고 성밖으로 나와 임시로 가태리(嘉泰里)에 있는 비슬산에 장례를 치루고 적군을 피해 강원도 울진현으로 갔다.
정유재란(1597년) 때에는 화왕산성을 굳게 지켜 밀양, 창녕, 영산, 현풍 등지를 안전하게 지켰다.
51세(1602년)에 석방되어 비슬산에 들어가 솔잎을 먹으면서 곡식음식을 물리쳤다. 창암강(滄巖江)가에 정자를 지었다. 창암강은 영산현(靈山縣) 남쪽에 있는데 선생이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즐겨하여 강가에 정자를 짓고 망우(忘憂)라는 현판을 걸어 만년에 거처할 곳으로 삼았다.
향사 : 곽재우는 1617년(광해군 9년) 66세 봄에 창증(脹症)을 앓게 되어 날로 위독해졌으나 침(緘)이나 약(藥)을 쓰지 못하게 하고 동년 4월 10일에 강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사우(祠宇)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년)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龍蛇應募錄』.
『火旺入城同苦錄』.
『龍蛇日記』.
『懲毖錄』.
『亂中雜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3·7·15.
郭再祐, 『忘憂集』 5권(『韓國文集叢刊』 58), 民族文化推進會, 1990.
郭再祐, 『忘憂堂先生文集(國譯)』 5권, 1996.
郭再祐, 『忘憂堂全書』 5권, 忘憂堂紀念事業會, 1987.
梁銀容, 「忘憂堂 郭再祐의 養生思想」, 『韓國道敎思想硏究叢書』 Ⅴ, 1991.
李章熙, 「忘憂堂 郭再祐의 義兵活動」, 『南冥學硏究』 2,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2.
洪瑀欽, 「嶺南儒學과 鶴峯·忘憂堂의 壬亂對應」, 『漢文學論集』 12, 檀國漢文學會, 1994.
許昌式, 「忘憂堂의 護國精神의 再照明」, 忘憂堂郭再祐先生 忠義精神學術發表會, 南冥學釜山硏究院, 1995.
崔錫起, 「先生의 節義精神」, 忘憂堂郭再祐先生 忠義精神學術發表會, 南冥學釜山硏究院, 1995.
梁銀容, 「忘憂堂 郭再祐의 思想」, 忘憂堂郭再祐先生 忠義精神學術發表會, 南冥學釜山硏究院, 1995.
金康植, 「忘憂堂 郭再祐의 義兵活動과 政治的 役割」, 忘憂堂郭再祐先生 忠義精神學術發表會, 南冥學釜山硏究院, 1995.
李樹健, 「忘憂堂 郭再祐 義兵活動의 社會·經濟的 基盤」, 『南冥學硏究』 5,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5.
金周漢, 「忘憂堂 文學의 自由追求 試論」, 『南冥學硏究』 5,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5.
金康植, 「忘憂堂 郭再祐의 義兵活動과 政治的 役割」, 『南冥學硏究』 5,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5.
崔錫起, 「忘憂堂 郭再祐의 節義精神」, 『南冥學硏究』 6,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6.
朴英鎬, 「忘憂堂 郭再祐」, 『南冥院報』 6, 南冥學硏究院, 1997.
郭敬烈, 「壬辰嶺南忠義錄」, 『壬辰嶺南義兵史』, 壬亂護國嶺南忠義壇保存會, 200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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