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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46. 이제신(李濟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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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959회 작성일 03-10-2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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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이제신(李濟臣, 1536∼1583)의 자는 몽응(夢應)이고 호는 청강(淸江)이며, 본관은 전의(全義)로 양근(陽根)에 거주하였다. 그는 1536년(중종 31년)에 아버지 문성(文誠)의 아들로 서울 청파 반석방(盤石坊)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문인037.jpg

그가 남긴 문집은 『청강집(淸江集)』 4권 3책이 전한다.
급문 : 이제신(청강)은 17세(1552년)에 조욱(趙昱)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학업이 날로 진보되었다. 남명선생이 그를 한 번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 마침내 좌우에 차고 있던 경의(敬義)와 뇌천(雷天)의 두 패(牌)를 끌러서 그에게 차게 하고 장차 원대하게 될 것을 깊이 기대하였다고 한다(『德川師友淵源錄』, 卷3, 「門人」 李濟臣; 『淸江集』, 卷4, 「祭南冥先生文」).
수학 및 교육 : 이제신(청강)은 5세(1540년)에 글을 배웠는데, 공부의 과정(課程)을 기다리지 않고 부지런히 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8세(1543년)에는 아버지 참판공이 세상을 떠나자 절도공(節度公)은 변군(邊郡)에 있었으므로 선생이 어린 아이로 혼자 상례를 주관하고 다스리는 것이 모두 조리가 있었고, 곡하고 제사를 차리는 것이 법도와 의례를 한결같이 하였다. 10세(1545년)에는 절도공이 창원에 벼슬하러 나갈 때 함께 따라 갔으며, 지나는 길에 물 한 줄기, 바위 하나에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자취가 있는 것을 보면, 문득 발을 멈추고 읊조리고 완상하며 돌아왔다.
19세(1554년)에는 『시경』을 읽다가 구역(九罭)편에 이르러, 성인이 변고(變故)에 처하여도 그 떳떳함을 잃지 않는 구절에 깊은 감동을 받아 오언시를 지었다. 과거 및 벼슬 : 이제신(청강)은 13세(1548년)에 향위(鄕圍) 진사 초시에 뽑혔으나, 절도공이 그 빠름을 염려하여 주사(主司)에게 그 이름을 빼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소문이 더욱 무성하였고, 더불어 사귀는 사람들 중에 문인, 장자(長者)가 많았다.
1555년(명종 10년)에 남명선생은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되자 당시의 현실을 매우 위급한 상황으로 파악하고 다음과 같이 사직하는 소를 올렸다.

…… 나라 일이 이미 그릇되어 나라 근본이 벌써 망해가고, 하늘의 뜻이 이미 떠나갔으며, 인심도 이미 떠나버려 비유한다면 백년 묵은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다 먹고 진액이 다 말라 버려서 망연히 회오리 바람과 소나기가 어느 때에 닥쳐올 지 알지 못하고 있는지 오래된 것과 같다. …… .
자전[문정황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나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못하고, 전하께서는 아직 유충(幼沖)하시어 다만 선왕의 하나의 외로운 후사(後嗣)이니 수천가지의 천재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어찌 감당하시며 수습하시겠습니까? …… .

이 소는 남명선생이 명종 10년 10월 11일에 단성현감에 임명된 뒤 11월 19일에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의 일부이다.
명묘(明廟)가 ‘과부’ 두 글자가 불손하다고 하여 진노하면서 남명선생을 벌주려고 했을 때, 당시 이제신(청강, 당시 31세, 1566년) 남명선생이 을묘년에 사직하는 상소는 당시 55세(1555년)의 일인데, 청강의 문집에는 이제신(청강)의 나이 31세(1566년)로 기록되어 있어서 연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 우사(右史)로 입시해 있을 때였다.

좌상(左相)인 상공(尙公) 진(震)이 그로 하여금 송사(宋史) 영종기(英宗紀)에서 구양수가 자성(慈聖)에게 고한 ‘태후는 깊은 궁궐 안에 있는 일개 부인이요, 신(臣) 등은 오,륙 서생’이라는 말을 찾아내게 하고 ‘마땅히 이것으로 임금님의 진노를 풀도록 하라’고 하였다. 다음 날 궐에 나아가 계(啓)하기를 ‘조식(曺植)의 소는 오로지 고인(古人)을 답습하여 임금님께 아뢴 것으로 나라의 위태로운 형세를 극진히 말한 것이지 방자한 말이 아닙니다(『淸江先生續集』, 권1, 「연보」 31세조)’

라고 하니 임금이 마침내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21세(1556년)에는 한성시(漢城詩)에 책문(策文)을 써서 뽑혔고, 23세(1558년)에는 식년 생원 제3등으로 합격하였으며(『司馬榜目』), 29세(1564년) 가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제신(청강)은 29세(1564년)에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로 보임되어 30세(1565년)에 예에 의해 부정자(副正字)에 천거되고 홍문관록(弘文館錄)에 뽑혔고, 31세(1566년) 봄에는 예문관 검열(『明宗實錄』 21년)에 뽑혀 검열대교봉교 겸 춘추관기주관(檢閱待敎奉敎 兼 春秋館記注官)이 되었다.
32세(1567년)에는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형조, 공조, 호조 3조의 좌랑(左郞),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고, 겨울에 병조좌랑 겸 기주관으로 천거되어 들어가 명묘실록을 편찬하였다. 이 해에 명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 선생이 이이(李珥), 윤근수(尹根壽), 김우옹(金宇顒) 등과 더불어 제술관(製述官)에 뽑히니, 모두 당시의 최고로서 선발된 것이다.
36세(1571년)에는 그가 학문을 권장하고 유학을 일으키는 것으로 정치의 근본을 삼았다.
저술 : 16세(1551년)에 「고재설(顧齋說)」을 지었다.
향사 : 그는 1583년(선조 16년)에 세상을 떠난 후 양근(楊根)의 미원(迷源), 서원 청주(淸州)의 송천(松泉), 서원 울산의 학호(鶴湖) 등의 세 군데에 서원이 세워지고 향사되었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李濟臣, 『淸江集』 4권(『韓國歷代文集叢書』 43), 서울: 景仁文化社, 1988.
『民族文化大百科辭典』 8·13·18·19·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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