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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56. 김면(金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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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035회 작성일 03-10-2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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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김면(金沔, 1541~1593)의 자는 지해(志海)이고 호는 송암(松菴)이며,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고령(高靈)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1년(중종 36년) 경상도 고령(현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에서 부사(府使) 세문(世文)과 김해(金海) 김씨(金氏)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남긴 자료는 『송암실기(松菴實紀)』가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김면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과거공부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정구(鄭逑) 등 제현과 막역하게 지냈다. 군자의 고을에서 자라고 성리의 학문을 갈고 닦아 후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임무로 삼으니 배우는 사람들이 문에 가득이 모여 들었다.
그는 6세 때까지 『대학』, 『중용』 등을 두루 읽고, 11세(1551년)에는 퇴계선생을 찾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배웠으며, 성주, 대구, 고령 등 인근 고을의 백일장에 참석하여 글재주를 발휘하였다. 20세(1560년)에는 도산(陶山)으로 퇴계선생을 찾아가 정식으로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급문 : 김면은 19세(1559년)에 지리산 아래 덕산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으며(『德川師友淵源錄』, 卷3,「門人」 金沔;「松菴先生實紀年譜」), 경의지설(敬義之說)을 듣고 정구(鄭逑) 및 제현들과 강론하였다 「남명선생편년」에는 남명선생이 60세 때(1560년)에 김면이 와서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남명이 덕산으로 이주한 것은 김면이 21세 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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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면은 28세(1568년)에 재실을 짓고 남명선생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자 남명선생은 ‘송암(松菴)’이라는 현판을 자필로 써 주었으며, 이로부터 자신의 호로 삼았다.
벼슬 : 선조초에 효행과 청렴으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곧이어 유일로서 조목(趙穆)·정구(鄭逑)와 더불어 6품직에 올랐다. 합천군수, 장낙원정,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선무원종일등 공신이 되었다.
강학 및 교유 : 그는 17세(1557년)에 정구(鄭逑), 김우옹, 송사이, 박찬, 이린(李嶙), 이홍량(李弘量), 이승, 이기춘(李起春) 등과 더불어 도를 논하고 강학하였다(『雪峯實紀』).
23세(1563년)에는 김우옹, 정구(鄭逑), 박성(朴惺), 노흠, 배신, 이기춘(李起春), 전치원 등과 도의로 사귀었고(『濯溪集』; 『月窩逸稿』), 26세(1566년) 봄에는 박찬, 이기춘(李起春) 등과 더불어 『심경』을 공부하였는데, 서로 배우는 바가 많았다(『雪峯實紀』).
39세(1579년) 9월에는 박찬, 이인개(李仁愷), 정구(鄭逑), 곽준(郭䞭), 이기춘(李起春) 등과 더불어 가야산 해인사를 유람하고 돌아와 청휘당(晴暉堂)으로 이승을 방문하였다(『雪峯實紀』; 『晴暉堂實紀』).
53세(1593년) 정월에는 이대기가 김면을 만나러 왔으며, 이대기는 의령에 이르러 곽재우, 오운 등과 일을 논의하였다(『雪壑先生文集』).
의병활동 : 1592년(선조 25년) 52세 때 4월에 왜란이 일어나자 김면은 ‘임근이 위급한데 신하가 죽기를 무릅쓰지 않는다면 성현의 글을 읽어서 무엇하리오(『茅村集』)’라고 하고는 향병(鄕兵)을 모아 곽재우 등과 창의(倡義)하였다. 이 소식을 이정(李瀞)이 듣고 이칭, 박제인 등과 함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가 문안 드리고자 하였으나 5월 10일에 동문인 내암 정인홍이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하므로 송암 김면과 함께 합천의 숭산동에서 회합하여 우도 각지에 산재해 있던 자신의 문인을 주축으로 창의하여 대대적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괄목할 만한 전과를 올렸다(『來庵集』). 김면이 고령은 군세가 작다고 여겨 거창으로 달려갔는데, 그 때 거창의 선비와 백성이 이미 모아둔 약간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김면은 곽준(郭䞭), 문위(文緯), 윤경남(尹景男), 박정번(朴廷璠), 유중룡(柳仲龍) 등을 참모로 삼고 박성(朴惺)을 시켜 군량을 모으게 하였다. 4~5일 동안에 군사 2,000여 명이 모였다.

당시 김면은 맨 처음 집안에서 부리는 종 700명을 이끌고 기병(起兵)하였다. 6월에 이승(李承)과 더불어 거창에서 창의하였다(『晴暉堂實紀』).
임진왜란 중에 고군분투하던 김면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선산(善山)에 집결한 왜적을 격퇴할 작전을 계획하던 중 갑자기 병을 얻었다. 그는 운명 직전에 “다만 나라 있는 줄 알았고, 내 몸 있는 줄 몰랐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고령, 거창 등지에서 창의기병하여, 개산포, 지례, 우척현, 정암진, 무계, 사랑암, 성주, 금산, 개령 등지에서 왜구와 전투하였다. 그는 경상합도 의병대장으로 경상도의 의병을 총괄하였다.
저술 : 김면은 21세(1561년)에 『율례지(律禮志)』 2권을 지어 남명선생에게 보여 수정을 구하자, 남명선생이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松菴年譜」)고 한다.
향사 : 1593년(선조 26년)에 김면이 세상을 떠난 후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자헌대부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고, 정헌대부 이조판서(正憲大夫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고령의 도암서원(道巖書院)과 남전서원(藍田書院)에 제향되었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亂中雜錄』.
『壬辰日錄』.
金誠一, 『鶴峰全集』.
李 魯, 『龍蛇日記』.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金沔, 『松菴實紀』.
『民族文化大百科辭典』 2·4·6·13·18.
高靈文化院編,「松菴先生實紀」, 高靈文化院, 1978.
金康植,「松菴 金沔의 義兵活動」, 『南冥學硏究』 2,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2.
兪丙圭,「임진왜란과 송암 김면」, 『高靈文化』 10, 高靈文化院, 1995.
정현재,「경상우도 임진의병의 전적 검토-金沔, 鄭仁弘 의병군단을 중심으로-」, 『慶南文化硏究』 17, 慶尙大學校 慶南文化硏究所, 1995.
郭敬烈,「壬辰嶺南忠義錄」, 『壬辰嶺南義兵史』, 壬亂護國嶺南忠義壇保存會, 200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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