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28. 곽율(郭走+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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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곽율(郭走+日 , 1531~1593)의 자는 태정(泰靜)이고 호는 예곡(禮谷)이며, 본관은 현풍(玄風)으로 솔례(率禮)에 거주하였다. 그는 1531년(중종 26년)에 현풍(玄風) 솔례(率禮)에서 아버지 참봉공 지인(之仁)과 어머니 창녕(昌寧)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예곡집(禮谷集)』 2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곽율은 어려서부터 경전(經傳)을 읽을 때는 글의 내용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공부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5~16세 때에는 종숙(從叔)인 곽지운이 여러 사람들에게 ‘곽율은 장래가 촉망된다’고 칭찬하면서 『소학』을 가르치니 책에 있는 것을 그대로 본받아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급문 : 곽율은 청년시절에 김해의 산해정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서 제자의 예를 올리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과거 및 벼슬 : 곽율은 28세(1558년) 가을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분수(分數)의 경중(輕重)을 알고 영리(營利)에 뜻을 두지 아니하였다. 29세(155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는 42세(1572년) 겨울에 성균관의 천거로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 從6品)에 취임하였고, 43세(1573년) 봄에는 어버이를 모시기 가까운 김천도 찰방(金泉道察訪)으로 전임(轉任)되었다. 찰방은 역의 교통 통신과 관련한 업무와 말을 관리하며 관내 백성들에 대한 대민 업무도 수행하는 직책이었다. 그는 찰방으로 근무하면서 지역 백성들의 세금 중에서 명분이 없는 세는 절반으로 줄이고, 한 조각의 물건도 사사로이 취하지 않았으며, 거두어들인 쌀이나 베 등을 절약하여 저축해 두었다가 공공의 일에 사용하기도 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55세(1585년)에는 학행으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특진되었고, 56세(1586년)에는 홍산현감(鴻山縣監)으로 임지에 내려가 민심과 문풍을 쇄신하였으며, 61세(1591년)에는 예천군수(醴泉郡守)를 지냈다.
강학 및 교유 : 곽율은 29세(1559년)에 당시 남명선생의 문인 정구(鄭逑), 김우옹(金宇顒), 배신(裵紳)과 김부륜(金富倫), 박성(朴惺), 곽준(郭䞭) 등과 도의로 교유하였다.
의병활동 : 곽율은 62세(1592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예천군수직에서 물러나 덕유산 아래 갈천동(葛川洞)에 있었으며, 당시 합천, 초계, 거창, 삼가, 고령 등지에서 전 장령 정인홍, 전 좌랑 김면, 전 현감 박성, 유생 곽준(郭䞭), 하혼, 조응인, 문경호, 권양(權瀁), 박이장(朴而章), 문홍도(文弘道) 등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였다(『龍蛇日記』; 『慶尙道巡營錄』).
그후 초유사 김성일이 곽율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초계가수(草溪假守)로 임명하였다.
초계가수로 부임한 곽율은 당시 초계 의병장인 전치원, 이대기 등과 더불어 낙동강에서 배로 침입하는 왜적을 수 차례에 걸쳐 토벌하였으며, 특히 의병군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곽율이 초계가수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자, 의병활동의 공이 인정되어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종3품)에 제수됨에 도내 유생 정유명(鄭惟明) 등이 상소하기를,
초계는 낙동강 변의 요충지로서 적의 왕래에는 여기를 거쳐야 하는데 감히 오지 못하는 이유는 곽율이 마음을 다하여 방비한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식으로 임명하여 그 공을 세우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얼마 후 곽율은 초계군수로 정식 임명되니 가수로 있은 지 3개월 만이었다.
그는 성주, 합천, 고령, 고창, 초계 등 5읍군병과 합세하여 성주, 무계 전투에 참여하였다.
향사 : 곽율은 1593년(선조 26년) 63세에 정식 초계군수로 임명되어 의병 지원과 백성들을 보살피다가 난중에 너무 과로하여 초계의 관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현풍의 도동서원 별사(道東書院別祠)와 현풍 화산서원(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25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慶尙道巡營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東儒師友錄』.
『淸選考』.
金誠一, 『鶴峰全集』.
全致遠, 『濯溪集』.
郭 율, 『禮谷集』 2권 1책.
郭 율, 『國譯禮谷先生文集』, 國譯禮谷先生文集刊行委員會, 1993.
李 魯, 『龍蛇日記』.
『民族文化大百科辭典』 3·16.
韓相奎, 「禮谷 郭走日의 선비 精神」, 『南冥學硏究』 4,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4.
慶尙大學校南冥學硏究所資料出版部, 「『禮谷集』解題」, 『南冥學硏究』 5,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5.
徐首生, 「禮谷先生實紀 解題」, 『禮谷 郭走日의 선비精神』, 玄風郭氏慕禮會, 1995.
郭敬烈, 『禮谷郭走日先生略史』, 玄風郭氏慕禮會, 1997.
곽율(郭走+日 , 1531~1593)의 자는 태정(泰靜)이고 호는 예곡(禮谷)이며, 본관은 현풍(玄風)으로 솔례(率禮)에 거주하였다. 그는 1531년(중종 26년)에 현풍(玄風) 솔례(率禮)에서 아버지 참봉공 지인(之仁)과 어머니 창녕(昌寧)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예곡집(禮谷集)』 2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곽율은 어려서부터 경전(經傳)을 읽을 때는 글의 내용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공부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5~16세 때에는 종숙(從叔)인 곽지운이 여러 사람들에게 ‘곽율은 장래가 촉망된다’고 칭찬하면서 『소학』을 가르치니 책에 있는 것을 그대로 본받아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급문 : 곽율은 청년시절에 김해의 산해정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서 제자의 예를 올리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과거 및 벼슬 : 곽율은 28세(1558년) 가을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분수(分數)의 경중(輕重)을 알고 영리(營利)에 뜻을 두지 아니하였다. 29세(155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는 42세(1572년) 겨울에 성균관의 천거로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 從6品)에 취임하였고, 43세(1573년) 봄에는 어버이를 모시기 가까운 김천도 찰방(金泉道察訪)으로 전임(轉任)되었다. 찰방은 역의 교통 통신과 관련한 업무와 말을 관리하며 관내 백성들에 대한 대민 업무도 수행하는 직책이었다. 그는 찰방으로 근무하면서 지역 백성들의 세금 중에서 명분이 없는 세는 절반으로 줄이고, 한 조각의 물건도 사사로이 취하지 않았으며, 거두어들인 쌀이나 베 등을 절약하여 저축해 두었다가 공공의 일에 사용하기도 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55세(1585년)에는 학행으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특진되었고, 56세(1586년)에는 홍산현감(鴻山縣監)으로 임지에 내려가 민심과 문풍을 쇄신하였으며, 61세(1591년)에는 예천군수(醴泉郡守)를 지냈다.
강학 및 교유 : 곽율은 29세(1559년)에 당시 남명선생의 문인 정구(鄭逑), 김우옹(金宇顒), 배신(裵紳)과 김부륜(金富倫), 박성(朴惺), 곽준(郭䞭) 등과 도의로 교유하였다.
의병활동 : 곽율은 62세(1592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예천군수직에서 물러나 덕유산 아래 갈천동(葛川洞)에 있었으며, 당시 합천, 초계, 거창, 삼가, 고령 등지에서 전 장령 정인홍, 전 좌랑 김면, 전 현감 박성, 유생 곽준(郭䞭), 하혼, 조응인, 문경호, 권양(權瀁), 박이장(朴而章), 문홍도(文弘道) 등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였다(『龍蛇日記』; 『慶尙道巡營錄』).
그후 초유사 김성일이 곽율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초계가수(草溪假守)로 임명하였다.
초계가수로 부임한 곽율은 당시 초계 의병장인 전치원, 이대기 등과 더불어 낙동강에서 배로 침입하는 왜적을 수 차례에 걸쳐 토벌하였으며, 특히 의병군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곽율이 초계가수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자, 의병활동의 공이 인정되어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종3품)에 제수됨에 도내 유생 정유명(鄭惟明) 등이 상소하기를,
초계는 낙동강 변의 요충지로서 적의 왕래에는 여기를 거쳐야 하는데 감히 오지 못하는 이유는 곽율이 마음을 다하여 방비한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식으로 임명하여 그 공을 세우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얼마 후 곽율은 초계군수로 정식 임명되니 가수로 있은 지 3개월 만이었다.
그는 성주, 합천, 고령, 고창, 초계 등 5읍군병과 합세하여 성주, 무계 전투에 참여하였다.
향사 : 곽율은 1593년(선조 26년) 63세에 정식 초계군수로 임명되어 의병 지원과 백성들을 보살피다가 난중에 너무 과로하여 초계의 관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현풍의 도동서원 별사(道東書院別祠)와 현풍 화산서원(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25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慶尙道巡營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東儒師友錄』.
『淸選考』.
金誠一, 『鶴峰全集』.
全致遠, 『濯溪集』.
郭 율, 『禮谷集』 2권 1책.
郭 율, 『國譯禮谷先生文集』, 國譯禮谷先生文集刊行委員會, 1993.
李 魯, 『龍蛇日記』.
『民族文化大百科辭典』 3·16.
韓相奎, 「禮谷 郭走日의 선비 精神」, 『南冥學硏究』 4,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4.
慶尙大學校南冥學硏究所資料出版部, 「『禮谷集』解題」, 『南冥學硏究』 5,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5.
徐首生, 「禮谷先生實紀 解題」, 『禮谷 郭走日의 선비精神』, 玄風郭氏慕禮會, 1995.
郭敬烈, 『禮谷郭走日先生略史』, 玄風郭氏慕禮會,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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