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38. 김홍미(金弘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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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김홍미(金弘微, 1557∼1605)의 자는 창원(昌遠)이고 호는 성극당(省克堂)이며,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그는 1557년(명종 12년)에 아버지 범랑(範郞)의 아들로 태어나 상주(尙州)에 거주하였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성극당집(省克堂集)』 3권 2책이 전한다.
김홍미는 남명선생과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며 남명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 제문을 지었다.
과거 및 벼슬 : 김홍미는 23세(1579년)에 식년 진사에 제1등으로 합격하였고(『사마방목』), 29세(1585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29세(1585년) 승문원 부정자에 발탁되고, 홍문관 정자, 저작, 예문관 검열 등을 거쳐 부수찬을 역임하였으며, 당시 형인 홍민(弘敏)과 함께 사림으로 영예를 누렸다.
32세(1588년)에는 홍문관에 전차(塡差)되었고(『宣祖實錄』 21년 1월 7일), 33세(1989년)에는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남인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36세(1592년)에는 경상좌도 도사(慶尙左道都事)에 제수되었고(『宣祖實錄』 25년 7월 26일), 37세(1993년)에는 경연관, 응교, 사간, 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39세 때(1595년) 2월 6일의 선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김홍미는 박학한 사람인데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라고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역변(逆變) 때 파직되어 귀향했다가 변란 후에 경상도사(慶尙都事)에 제수되었는데, 모친 상을 당하여 또 안동 지방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역』도 아는가?’라고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주역』을 아는지의 여부는 신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대개 박학하니 필시 잘 알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8월 3일에 이조정랑에 제수되었으며, 9월 9일에는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11월 9일에 겸시강원 문학에 제수되었다(『宣祖實錄』 28년).
40세(1596년) 8월 23일에는 사간으로(『宣祖實錄』 29년), 41세(1597년) 1월 13일에는 홍문관 응교에 제수되고 4월 23일에 좌부승지에 제수하였으며 11월 22일에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宣祖實錄』 30년). 승정원 동부승지로 있을 때,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탄핵하여 파면하게 하고 원균을 통제사로 삼게 하는 데 가담하였다. 42세(1598년) 9월 20일에는 형조 참의로 제수되어 9월 26일에 대사간이 되었고 12월 30일에 좌부승지가 되었다(『宣祖實錄』 31년). 43세(1599년) 1월 3일에는 청송부사로 임명되었고(『宣祖實錄』 32년), 46세(1602년) 7월 6일에는 여주목사(驪州牧使)가 되었다(『宣祖實錄』 35년). 48세(1604년) 1월 18일에 강릉부사(江陵府使)가 되었는데(『宣祖實錄』 37년), 이듬해 큰 비가 내려 백성이 많은 재난을 당하자 그는 약한 몸을 이끌고 수재로 죽은 자의 조문과 굶주린 자의 진휼에 힘써 직무에 충실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21년, 25년, 28년~32년, 35년, 37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金弘微, 『省克堂集』 3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5·10·12.
김홍미(金弘微, 1557∼1605)의 자는 창원(昌遠)이고 호는 성극당(省克堂)이며,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그는 1557년(명종 12년)에 아버지 범랑(範郞)의 아들로 태어나 상주(尙州)에 거주하였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성극당집(省克堂集)』 3권 2책이 전한다.
김홍미는 남명선생과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며 남명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 제문을 지었다.
과거 및 벼슬 : 김홍미는 23세(1579년)에 식년 진사에 제1등으로 합격하였고(『사마방목』), 29세(1585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29세(1585년) 승문원 부정자에 발탁되고, 홍문관 정자, 저작, 예문관 검열 등을 거쳐 부수찬을 역임하였으며, 당시 형인 홍민(弘敏)과 함께 사림으로 영예를 누렸다.
32세(1588년)에는 홍문관에 전차(塡差)되었고(『宣祖實錄』 21년 1월 7일), 33세(1989년)에는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남인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36세(1592년)에는 경상좌도 도사(慶尙左道都事)에 제수되었고(『宣祖實錄』 25년 7월 26일), 37세(1993년)에는 경연관, 응교, 사간, 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39세 때(1595년) 2월 6일의 선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김홍미는 박학한 사람인데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라고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역변(逆變) 때 파직되어 귀향했다가 변란 후에 경상도사(慶尙都事)에 제수되었는데, 모친 상을 당하여 또 안동 지방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역』도 아는가?’라고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주역』을 아는지의 여부는 신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대개 박학하니 필시 잘 알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8월 3일에 이조정랑에 제수되었으며, 9월 9일에는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11월 9일에 겸시강원 문학에 제수되었다(『宣祖實錄』 28년).
40세(1596년) 8월 23일에는 사간으로(『宣祖實錄』 29년), 41세(1597년) 1월 13일에는 홍문관 응교에 제수되고 4월 23일에 좌부승지에 제수하였으며 11월 22일에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宣祖實錄』 30년). 승정원 동부승지로 있을 때,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탄핵하여 파면하게 하고 원균을 통제사로 삼게 하는 데 가담하였다. 42세(1598년) 9월 20일에는 형조 참의로 제수되어 9월 26일에 대사간이 되었고 12월 30일에 좌부승지가 되었다(『宣祖實錄』 31년). 43세(1599년) 1월 3일에는 청송부사로 임명되었고(『宣祖實錄』 32년), 46세(1602년) 7월 6일에는 여주목사(驪州牧使)가 되었다(『宣祖實錄』 35년). 48세(1604년) 1월 18일에 강릉부사(江陵府使)가 되었는데(『宣祖實錄』 37년), 이듬해 큰 비가 내려 백성이 많은 재난을 당하자 그는 약한 몸을 이끌고 수재로 죽은 자의 조문과 굶주린 자의 진휼에 힘써 직무에 충실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21년, 25년, 28년~32년, 35년, 37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金弘微, 『省克堂集』 3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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