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40. 이정(李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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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이정(李瀞, 1541∼1613)의 자는 여함(汝涵)이고 호는 모촌(茅村)이며, 본관은 재령(載寧)으로 원당(元塘)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1년(중종 36년)에 함안 모곡리에서 참판 경성(景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모촌집(茅村集)』 5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이정(李瀞)은 7세(1547년)에 부친으로부터 『효경』을 배웠고, 8세(1548년)에 백씨(伯氏) 미촌공(薇村公)을 따라 십구사(十九史)를 배웠다.
15세(1555년)에는 남명선생이 모곡으로 부친 참판공을 만나러 왔다가 4형제가 의좋게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칭찬하였다.
급문 : 이정(李瀞)은 19세(1559년) 봄에 남명선생으로부터 『중용』, 『대학』, 『심경』 등에 대하여 배웠고, 20세(1560년)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통한 후 남명선생을 찾아뵈었다(『茅村集』, 卷3, 「年譜」 19 및 20歲條).
벼슬 : 이정(李瀞)은 54세(1594년)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이어 단성현감에 제수되었고, 57세(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그는 의령현감으로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와 함께 의령에 침입한 나베시마(鍋島直茂) 휘하의 왜군을 격파하였다.
60세(1600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진주 원당(元塘)으로 거쳐를 옮겼다. 원당은 부인 유씨(柳氏)의 고향으로 원당에 집을 지어 향매와(鄕梅窩)라 이름을 붙였다. 그는 모곡에 있던 붉은색, 흰색의 매화 두 그루를 옮겨 심었는데 이는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에서였다. 향매와에서 아침저녁으로 조용히 근처를 돌면서 시를 읊어보기도 하고 경치를 완상하기도 하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면서 호를 모촌(茅村)이라고 지었다. 또 악양의 삽암에 집을 지어 고려 신하 한유한(韓惟漢)의 청렴한 마음을 본 받고자 하였다. 62세(1602년)에는 12월 26일 상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3세(1603년) 5월에는 선산부사(善山府使)에, 7월에는 창원부사(昌原府使)에 제수되었다.
강학 및 교유 : 이정(李瀞)은 26세(1566년) 봄에 남명선생을 모시고 갈천(葛川)선생을 방문하였는데, 하항(河沆), 조종도, 하응도, 유종지 등도 함께 갔다. 노진의 집에 이르자 노진이 강익 및 제공들을 불러 함께 남명선생을 모시고 안음(安陰) 옥산동(玉山洞)으로 가서 심성정(心性情)을 공부하였다. 29세(1569년) 봄에는 남명선생을 뵈러가서 최영경, 김우옹 등과 더불어 『심경』을 공부하였다.
45세(1585년)에는 하항(河沆), 유종지 등의 여러 선비들과 진주의 공옥대(拱玉臺)에서 수계(修契)하였고, 46세(1586년) 가을에는 정구(鄭逑)가 군수가 되어 찾아왔으며, 혹인(或人)에게 심성기(心性氣)에 대해 답하였다.
51세(1591년)에는 고향에 모촌정사(茅村精舍)를 세워 여러 선비들과 학문을 강마하였다.
의병활동 : 이정(李瀞)은 1592년(선조 25년) 4월에 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함안군수 유숭인(柳崇仁)의 휘하에서 소모관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진해, 창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김면, 곽재우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칭, 박제인 등과 함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茅村集』). 53세(1593년) 봄에는 초유사 김성일을 만나 전쟁이 일어난 후 죽은 시체들이 산과 들에 그대로 버려져 있는데, 이를 마땅히 묻도록 해야 한다고 청원하였다.
저술 : 이정(李瀞)은 47세(1587년)에 군수인 정구(鄭逑)에게 글을 보내고, 박한주(朴漢柱)의 사우(祠宇)를 창건하였으며, 박제인, 이칭과 더불어 『함주지』를 편수하였다. 63세(1603년) 11월에는 「함안향안서(咸安鄕案序)」를 완성하고, 66세(1606년) 봄에 덕천서원에 가서 『서원록』을 수정하였다. 68세(1608년) 여름에 덕천원장으로 덕천서원에 들어가 하홍도(河弘度)를 맞이하여 선생의 문집을 수정하고 69세(1609년) 7월에 덕천서원으로 들어가 제현들과 더불어 『서원록』을 중수하였다.
스승추존활동 : 이정(李瀞)은 36세(1576년) 봄에 최영경, 하항(河沆) 등과 함께 덕천서원을 창건하는 일에 가담하였다. 40세(1580년) 봄에 덕천에 들어가 원규(院規)를 확정하였으며, 여름에 창녕으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예(禮)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61세(1601년)에 진극경, 하징, 성여신 등과 더불어 병화로 소실된 덕천서원을 중건하고 최영경을 배향하자고 도모하였다. 62세(1602년)에 진극경, 이광우, 하징 등과 더불어 병란으로 불타버린 덕천서원을 중건하였다(『竹閣集』).
문인신원과 관련하여 이정(李瀞)은 50세(1590년) 7월 11일에 여러 동지들과 합천향교에 모여 최영경의 신원소를 올리는 일을 논의하였다. 이 때 최영경은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로, 오장, 하응도, 박제인, 이대기, 문위, 하혼 등과 더불어 합천에서 최영경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으며, 문경호가 소두(疏首)가 되었다(『濯溪集』). 63세(1603년) 겨울에 다시 덕천서원에 가서 이광우, 하징, 진극경 등과 두류산의 경치를 구경하였다. 70세(1610년)에 이광우의 삼우당(三憂堂, 文益漸)선생 사당 건축에 답장하였다.
향사 : 이정(李瀞)은 1613년(광해군 5년)에 73세의 일기로 원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함안의 도림서원(道林書院)과 진주의 대각서원(大覺書院)에서 제향되고 있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全致遠, 『濯溪集』 5권 1책.
李 瀞, 『茅村集』 5권 1책.
李光友, 『竹閣集』 2권 1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6·8·18.
이정(李瀞, 1541∼1613)의 자는 여함(汝涵)이고 호는 모촌(茅村)이며, 본관은 재령(載寧)으로 원당(元塘)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1년(중종 36년)에 함안 모곡리에서 참판 경성(景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모촌집(茅村集)』 5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이정(李瀞)은 7세(1547년)에 부친으로부터 『효경』을 배웠고, 8세(1548년)에 백씨(伯氏) 미촌공(薇村公)을 따라 십구사(十九史)를 배웠다.
15세(1555년)에는 남명선생이 모곡으로 부친 참판공을 만나러 왔다가 4형제가 의좋게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칭찬하였다.
급문 : 이정(李瀞)은 19세(1559년) 봄에 남명선생으로부터 『중용』, 『대학』, 『심경』 등에 대하여 배웠고, 20세(1560년)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통한 후 남명선생을 찾아뵈었다(『茅村集』, 卷3, 「年譜」 19 및 20歲條).
벼슬 : 이정(李瀞)은 54세(1594년)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이어 단성현감에 제수되었고, 57세(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그는 의령현감으로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와 함께 의령에 침입한 나베시마(鍋島直茂) 휘하의 왜군을 격파하였다.
60세(1600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진주 원당(元塘)으로 거쳐를 옮겼다. 원당은 부인 유씨(柳氏)의 고향으로 원당에 집을 지어 향매와(鄕梅窩)라 이름을 붙였다. 그는 모곡에 있던 붉은색, 흰색의 매화 두 그루를 옮겨 심었는데 이는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에서였다. 향매와에서 아침저녁으로 조용히 근처를 돌면서 시를 읊어보기도 하고 경치를 완상하기도 하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면서 호를 모촌(茅村)이라고 지었다. 또 악양의 삽암에 집을 지어 고려 신하 한유한(韓惟漢)의 청렴한 마음을 본 받고자 하였다. 62세(1602년)에는 12월 26일 상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3세(1603년) 5월에는 선산부사(善山府使)에, 7월에는 창원부사(昌原府使)에 제수되었다.
강학 및 교유 : 이정(李瀞)은 26세(1566년) 봄에 남명선생을 모시고 갈천(葛川)선생을 방문하였는데, 하항(河沆), 조종도, 하응도, 유종지 등도 함께 갔다. 노진의 집에 이르자 노진이 강익 및 제공들을 불러 함께 남명선생을 모시고 안음(安陰) 옥산동(玉山洞)으로 가서 심성정(心性情)을 공부하였다. 29세(1569년) 봄에는 남명선생을 뵈러가서 최영경, 김우옹 등과 더불어 『심경』을 공부하였다.
45세(1585년)에는 하항(河沆), 유종지 등의 여러 선비들과 진주의 공옥대(拱玉臺)에서 수계(修契)하였고, 46세(1586년) 가을에는 정구(鄭逑)가 군수가 되어 찾아왔으며, 혹인(或人)에게 심성기(心性氣)에 대해 답하였다.
51세(1591년)에는 고향에 모촌정사(茅村精舍)를 세워 여러 선비들과 학문을 강마하였다.
의병활동 : 이정(李瀞)은 1592년(선조 25년) 4월에 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함안군수 유숭인(柳崇仁)의 휘하에서 소모관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진해, 창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김면, 곽재우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칭, 박제인 등과 함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茅村集』). 53세(1593년) 봄에는 초유사 김성일을 만나 전쟁이 일어난 후 죽은 시체들이 산과 들에 그대로 버려져 있는데, 이를 마땅히 묻도록 해야 한다고 청원하였다.
저술 : 이정(李瀞)은 47세(1587년)에 군수인 정구(鄭逑)에게 글을 보내고, 박한주(朴漢柱)의 사우(祠宇)를 창건하였으며, 박제인, 이칭과 더불어 『함주지』를 편수하였다. 63세(1603년) 11월에는 「함안향안서(咸安鄕案序)」를 완성하고, 66세(1606년) 봄에 덕천서원에 가서 『서원록』을 수정하였다. 68세(1608년) 여름에 덕천원장으로 덕천서원에 들어가 하홍도(河弘度)를 맞이하여 선생의 문집을 수정하고 69세(1609년) 7월에 덕천서원으로 들어가 제현들과 더불어 『서원록』을 중수하였다.
스승추존활동 : 이정(李瀞)은 36세(1576년) 봄에 최영경, 하항(河沆) 등과 함께 덕천서원을 창건하는 일에 가담하였다. 40세(1580년) 봄에 덕천에 들어가 원규(院規)를 확정하였으며, 여름에 창녕으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예(禮)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61세(1601년)에 진극경, 하징, 성여신 등과 더불어 병화로 소실된 덕천서원을 중건하고 최영경을 배향하자고 도모하였다. 62세(1602년)에 진극경, 이광우, 하징 등과 더불어 병란으로 불타버린 덕천서원을 중건하였다(『竹閣集』).
문인신원과 관련하여 이정(李瀞)은 50세(1590년) 7월 11일에 여러 동지들과 합천향교에 모여 최영경의 신원소를 올리는 일을 논의하였다. 이 때 최영경은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로, 오장, 하응도, 박제인, 이대기, 문위, 하혼 등과 더불어 합천에서 최영경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으며, 문경호가 소두(疏首)가 되었다(『濯溪集』). 63세(1603년) 겨울에 다시 덕천서원에 가서 이광우, 하징, 진극경 등과 두류산의 경치를 구경하였다. 70세(1610년)에 이광우의 삼우당(三憂堂, 文益漸)선생 사당 건축에 답장하였다.
향사 : 이정(李瀞)은 1613년(광해군 5년)에 73세의 일기로 원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함안의 도림서원(道林書院)과 진주의 대각서원(大覺書院)에서 제향되고 있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全致遠, 『濯溪集』 5권 1책.
李 瀞, 『茅村集』 5권 1책.
李光友, 『竹閣集』 2권 1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6·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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