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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15. 이광우(李光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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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730회 작성일 03-10-2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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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이광우(李光友, 1529∼1619)의 자는 화보(和甫)이고 호는 죽각(竹閣)이며, 본관은 합천(陜川)으로 단성(丹城)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9년(중종 24년)에 단성 배양 마을에서 아버지 참봉(參奉) 잠(潛)과 어머니 성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문인012.jpg

그가 남긴 문집은 『죽각집(竹閣集)』 2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이광우는 10세(1538년) 때 백부 청향당(淸香堂, 李源)선생에게 『소학』을 배워 마당에 물뿌리고 응대하는 것으로부터 어버이를 모시고 어른을 공경하는 예절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가르침을 따라서 행하고 어기지 아니했다. 도간(陶侃)이 겁마땅히 짧은 시간이라도 아껴야 한다겂고 말한 데까지 읽고는 개연히 말하기를 겁배움의 부지런함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행장」)겂고 하였다. 이때부터 학업이 점차 진보하여 지시나 감독이 필요 없었다.

이광우는 『소학』을 읽으면서 것사람의 도리가 모두 이 책에 있구나겄라고 하면서 부지런히 공부하여 학문의 기본으로 삼았다. 76세(1604년) 정월에 외손자인 하홍도(河弘度)가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다.

이광우는 자질(子侄)을 가르침에 있어서 사장(詞章)을 일삼지 못하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겁정명도(程明道)가 일찍이 시문(詩文)을 아름답게 짓는 데에 빠져들면 뜻을 잃게 된다[喪志]고 경계하였는데, 후대의 학자들이 어찌 실학(實學)에 대해 애쓰지 아니할 것인가?(「행장」)겂라고 하였다.

급문 : 이광우는 22세(1550년)에 청향당선생의 명으로 종형 이광곤(李光坤)과 함께 남명선생을 찾아뵙고 그 문하에서 가르침 받기를 청하였다. 청향당선생은 남명·퇴계선생과 동갑으로 도의로 교유했던 인물이다. 그리하여 뜻을 돈독히 하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한번은 남명선생이 중용(中庸)·성(誠)·경(敬)·성(性)·도(道) 등의 설을 물었는데, 이광우가 분변하여 대답하기를 상세하고 분명하게 하였다. 그러자 남명선생이 기뻐하면서 겁노둔(魯鈍)한 너의 견해가 이에 이를 줄 몰랐다(「행장」 및 『南冥集』, 「編年」 50歲條)겂고 하였다.

강학 및 교유 : 이광우는 11세(1539년)에 종형인 이광곤과 함께 『효경』을 공부하였고, 14세(1542년)에 『중용』과 『대학』을 공부하였으며 18세(1546년)에 『주역』과 『예기』를 공부하였다.

20세(1548년) 겨울에는 외숙인 이조(李晁)와 더불어 단속사에서 『춘추』를 공부하였다. 23세(1551년) 3월에는 남명선생을 뵈었는데 이 때 오건도 와서 성리(性理)와 경의(敬義) 등을 강론하였다. 27세(1555년) 봄에 합천으로 가서 황강(黃江, 李希顔)선생을 만났고, 28세(1556년) 8월에는 남명선생에게 공부하러 갔다가 하항(河沆)을 만나 함께 수학하면서 벗으로 사귀었다. 30세(1558년) 4월에는 남명선생을 따라 두류산에 올랐다. 이 때 황강선생, 김홍, 이공량(李公亮), 이정(李楨) 등과 더불어 시 한 수를 남겼다.

35세(1563년) 3월에는 백부 청향당선생을 따라 도산(陶山)으로 가서 퇴계선생을 만나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이광우는 당대 대학자인 남명과 퇴계선생을 스승으로 삼아 가일층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퇴계선생을 만나고 와서 산천재에 갔는데, 이 때 김우옹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광우는 김우옹을 만나 학문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36세(1564년) 겨울에는 이천경과 더불어 청향당선생의 서재인 구사재(九思齋)에서 『성리대전』을 읽었다. 37세(1565년)에는 뇌룡사(雷龍舍)로 남명선생에게 공부하러 갔다가 최영경을 만났다(『竹閣集』). 이 때 최영경은 서울에서 남명선생의 명망을 듣고 문하에서 공부하기 위해 찾아 왔는데, 이광우와 최영경 두 사람은 동갑으로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할 정도로 뜻이 잘 맞았다고 한다. 최영경은 이광우를 보고, 것화보(和甫)는 집은 비록 가난하지만 스스로를 지켜 물욕에 』매임이 없으니 참으로 군자라고 할 만하다겄고 하면서 이광우의 인품을 칭찬하였다. 겨울에 정구(鄭構)와 구사재(九思齋)에서 주서(朱書)를 토론하였다. 38세(1566년) 정월에는 백부 청향당의 명으로 퇴계선생을 만나 이기(理氣)에 대해 질문하고 돌아왔다. 이 해에 이정(李楨), 김우옹, 하항(河沆), 노진, 강익, 정유명, 정구(鄭逑), 조종도 등과 더불어 남명선생을 모시고 단속사에서 산천재로 모였는데, 이광우가 이 소식을 듣고 백부 청향당선생을 따라 제현들과 수일 간 공부하고 돌아왔다. 39세(1567년) 3월에는 배양 북쪽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짓고 편액을 죽각(竹閣)이라 하였다. 죽림정사를 지어 여러 벗들과 학문을 연마하였다. 하항(河沆)이 덕천에서 죽림정사로 방문하였다. 4월에 오건이 방문하였다. 51세(1579년) 봄에는 수곡으로 하항(河沆)을 방문하였다.

75세(1603년) 9월에는 친구인 선비들과 함께 덕천서원에 모여 강론하였는데, 이광우, 이천경, 진극경, 정승윤(鄭承尹), 성여신, 하징, 하성(河惺), 신가(申), 하수일(河受一), 정승훈(鄭承勳), 이유함(李惟), 하광국(河光國), 조영한, 조겸(趙), 이명고, 이각(李殼), 조영기, 문홍운(文弘運), 박인(朴絪) 등의 여러 선비들이 모두 와서 모였고, 그 밖에 또 33인이 왔다(『凌虛集』). 78세(1606년)에는 중건한 덕천서원을 참배하러 온 정구(鄭逑)가 죽림정사를 방문하였고 겨울에 덕천서원에 가서 이정(李瀞), 하징, 진극경 등과 두류산을 유람하였다. 79세(1607년) 9월에는 이정(李瀞)이 배양리(培養里)로 방문하였고(『茅村集』), 82세(1610년)에는 이정(李瀞)으로부터 문익점(文益漸)의 사당 건축에 대한 편지를 받았다(『茅村集』).

「행장」에 의하면 이광우는 남명선생의 문하에 빼어난 인재들이 운집하였는데 정구(鄭逑), 김우옹, 이정(李楨), 노진, 오건, 강익, 하항(河沆), 최영경, 서사원(徐思遠), 박이장(朴而章) 등과 같은 이들이었다. 그는 이들과 더불어 잘 사귀어 나아가서는 스승의 훈도를 받고 물러나서는 서로 연마하였다.

학문 : 이광우는 『소학』에 근본을 두고 경전(經傳)으로 범위를 넓혔다. 효제와 충신으로 덕에 나아가는 부절을 삼았으며, 성(誠)과 경(敬)으로 첫 번째의 공부라 여겨 겁성(誠)의 빗장이 스스로 견고하다면 바깥의 도적이 어떻게 들어오겠는가겂라고 하였다. 하홍도(河弘度)는 겁외조부께서는 비록 난리의 피난중이시거나 늙어 병약하실 때에도 성(誠)과 경(敬)의 학문을 그치지 않으셨다겂고 하였다. 이광우가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겁사람이 태어날 때 타고나는 것은 같지 않다. 만약 상지(上智)의 자질이 아니라면 어찌 학지(學知) 곤지(困知)의 구별이 없겠는가? 증삼의 노둔함으로써도 마침내 일관(一貫)의 뜻을 알았으니, 진실로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고 끝까지 연구하여 찾아 들어간다면 저절로 이르는 바가 있을 것(「행장」)겂이라고 하였다. 대개 이광우의 학문은 독실함에서 『어진 것인데, 이는 남명선생에게서 허여되었던 것이다.

의병활동 : 이광우는 64세(1592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덕산동으로 이주하였으며, 곧 초유사 김성일을 만나 사위 전유룡을 천거하였다. 전유룡은 곧 소모관의 직책을 맡았으며, 후에 곽재우를 따라 창녕 화왕산성에 들어가 왜적을 무찌르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 때 이광우가 직접 김성일의 군진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처지여서 사위를 대신 보내 왜적을 무찌르게 하였다.

1597년(선조 30년)에 왜구들이 다시 쳐들어 와 이광우가 달성(達成)애 사는 서사원(徐思遠)의 집으로 피난하였다. 비록 황망히 피난해 온 때였지만 서로 경전(經典)의 뜻을 강론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스승추존 및 서원창건활동 : 이광우는 48세(1576년)에 최영경, 하항(河沆), 손천우, 유종지, 하응도, 이천경, 이로, 이조 등과 서원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60세(1588년)에는 청향당선생을 위한 서원을 신안(新安)에 세우기로 하였다. 신안서원 낙성식 때 함안군수로 있던 정구(鄭逑)가 죽림정사를 방문하였다. 74세(1602년)에는 진극경, 이정(李瀞), 하징 등과 더불어 병란으로 불타버린 덕천서원을 중건하였고, 84세(1612년)에는 덕천서원에 가서 『남명선생학기』를 개정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행실 : 이광우는 세속적 욕망에 담담하였다. 젊었을 때에, 처갓집 사람으로 요직에 있던 사람이 그를 추천하여 벼슬을 주고자 하니 그가 힘껏 사양하여 말하기를 겁사람마다 뜻이 있는데, 저의 뜻은 이러한 데에 있지 않습니다겂라고 하였다. 최영경은 겁화보(和甫)가 물욕에 대해 담담하다겂고 하였고, 권도(權濤)는 겁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면서도 안빈낙도하는 사람(「행장」)겂이라고 그를 평하였다.

향사 : 이광우는 1619년(광해군 11년) 6월 23일에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0월에 고을 북쪽 갈려산(葛廬山)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선산이 모셔진 곳이었다. 그후 1791년(정조 15년)에 배산사(培山祠)에 배향되었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20.

李光友, 『竹閣集』 2권 1책(『南冥門徒 德川及門諸賢錄』) 李朝中期思想叢書, 서울: 亞細亞文化社,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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