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16. 하항(河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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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하항(河沆, 1538∼1590)의 자는 호원(浩源)이고 호는 각재(覺齋)이며, 본관은 진양(晋陽)으로 수곡(水谷)에 거주하였다. 그는 1538년(중종 33년)에 인서(麟瑞)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각재집(覺齋集)』 2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하항(河沆)은 15세(1552년)에 남명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문익성, 오건 등과 각별히 지내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玉洞先生年譜」). 36세(1573년)에는 유덕룡이 와서 배웠다(『堂實紀』).
급문 : 하항(河沆)은 19세(1556년)에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처음으로 수업하였다. 남명선생은 ‘하항이 재주가 있고 또 학문에 뜻이 독실함을 사랑하여 드디어 여러 성리서(性理書) 읽기를 권하니, 그가 이로부터 전적으로 몸을 위하는 학문을 숭상하여 의리의 공부를 일삼으니 남명선생이 매양 사람을 얻어 가르친다(『南冥集』, 「編年」 56歲條)’고 하였다.
과거 : 하항(河沆)은 30세(1567년)에 식년 생원에 제1등으로 합격하였다(『司馬榜目』).
강학 및 교유 : 하항(河沆)은 19세(1556년) 8월에 남명선생에게 공부하러 온 이광우를 만나 함께 수학하면서 벗으로 사귀었다(『竹閣集』).
24세(1561년)에 최영경, 이조, 오건, 김우옹, 유종지 등과 서로 오가며 강마하였고(『桐谷實紀』), 26세(1563년) 2월에는 남명선생이 남계서원을 찾았고, 강익과 더불어 갈천(葛川)선생의 집을 방문할 때에 하항(河沆)은 조종도, 하응도, 유종지, 진극경 등과 더불어 모시고 갔다(「南冥先生年譜」). 27세(1564년) 겨울에 정사현, 최영경 등이 박제현에게 정사시(精舍詩)를 주었다(『松先生文集』). 29세(1566년) 봄에 이정(李瀞)은 남명선생을 모시고 갈천선생을 방문하였는데, 이 때 하항(河沆)은 하응도, 유종지 등과 함께 갔으며, 노진(盧)의 집에 이르자 노진이 강익 및 제공들을 불러 함께 남명선생을 모시고 안음(安陰) 옥산동(玉山洞)으로 가서 심성정(心性情)을 공부하였다(『茅村集』).
30세(1567년)에는 하항(河沆)이 덕천에서 이광우의 죽림정사를 방문하였고(『竹閣集』), 41세(1579년) 봄에는 수곡으로 이광우가 방문하였으며(『竹閣集』), 46세(1584년)에는 이대기를 방문하였다(『雪壑先生文集』). 47세(1585년)에는 이정(李瀞), 유종지 등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진주의 공옥대(拱玉臺)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茅村集』).
스승추존활동 : 하항(河沆)은 39세(1576년)에 최영경, 유종지, 성여신 등과 더불어 덕천서원의 건립을 의논하였고(『浮査集』), 8월에 덕천에 남명선생의 사우(祠宇)를 세웠다. 이 때 최영경, 손천우, 유종지, 하응도, 이천경, 이로, 이조, 권세륜, 이광우, 이정(李瀞) 등과 힘을 합쳤다(『桐谷實紀』; 『茅村集』; 『竹閣集』).
1578년(선조 11년) 1월 11일에 경상 감사가, 겁진주(晋州)에서 사는 생원(生員) 하항(河沆, 40세) 등은 학식이 정밀하고 밝으며 조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宣祖實錄』 11년)겂는 계본을 올렸다.
하항(河沆)은 남명선생이 돌아가시자 심상을 입었고, 후에 덕천서원의 원장이 되어서는 일시의 사표가 되었다. 그리고 서원지(書院志)와 산해연원록(山海淵源錄)을 찬술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2년, 11년, 16년.
『宣祖修正實錄』 2년, 16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1·6·15.
河 沆, 『覺齋集』 2권(『韓國文集叢刊』 48), 民族文化推進會, 1990.
河 沆, 『覺齋集』 2권, 서울: 亞細亞文化社, 1982.
하항(河沆, 1538∼1590)의 자는 호원(浩源)이고 호는 각재(覺齋)이며, 본관은 진양(晋陽)으로 수곡(水谷)에 거주하였다. 그는 1538년(중종 33년)에 인서(麟瑞)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각재집(覺齋集)』 2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하항(河沆)은 15세(1552년)에 남명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문익성, 오건 등과 각별히 지내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玉洞先生年譜」). 36세(1573년)에는 유덕룡이 와서 배웠다(『堂實紀』).
급문 : 하항(河沆)은 19세(1556년)에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처음으로 수업하였다. 남명선생은 ‘하항이 재주가 있고 또 학문에 뜻이 독실함을 사랑하여 드디어 여러 성리서(性理書) 읽기를 권하니, 그가 이로부터 전적으로 몸을 위하는 학문을 숭상하여 의리의 공부를 일삼으니 남명선생이 매양 사람을 얻어 가르친다(『南冥集』, 「編年」 56歲條)’고 하였다.
과거 : 하항(河沆)은 30세(1567년)에 식년 생원에 제1등으로 합격하였다(『司馬榜目』).
강학 및 교유 : 하항(河沆)은 19세(1556년) 8월에 남명선생에게 공부하러 온 이광우를 만나 함께 수학하면서 벗으로 사귀었다(『竹閣集』).
24세(1561년)에 최영경, 이조, 오건, 김우옹, 유종지 등과 서로 오가며 강마하였고(『桐谷實紀』), 26세(1563년) 2월에는 남명선생이 남계서원을 찾았고, 강익과 더불어 갈천(葛川)선생의 집을 방문할 때에 하항(河沆)은 조종도, 하응도, 유종지, 진극경 등과 더불어 모시고 갔다(「南冥先生年譜」). 27세(1564년) 겨울에 정사현, 최영경 등이 박제현에게 정사시(精舍詩)를 주었다(『松先生文集』). 29세(1566년) 봄에 이정(李瀞)은 남명선생을 모시고 갈천선생을 방문하였는데, 이 때 하항(河沆)은 하응도, 유종지 등과 함께 갔으며, 노진(盧)의 집에 이르자 노진이 강익 및 제공들을 불러 함께 남명선생을 모시고 안음(安陰) 옥산동(玉山洞)으로 가서 심성정(心性情)을 공부하였다(『茅村集』).
30세(1567년)에는 하항(河沆)이 덕천에서 이광우의 죽림정사를 방문하였고(『竹閣集』), 41세(1579년) 봄에는 수곡으로 이광우가 방문하였으며(『竹閣集』), 46세(1584년)에는 이대기를 방문하였다(『雪壑先生文集』). 47세(1585년)에는 이정(李瀞), 유종지 등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진주의 공옥대(拱玉臺)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茅村集』).
스승추존활동 : 하항(河沆)은 39세(1576년)에 최영경, 유종지, 성여신 등과 더불어 덕천서원의 건립을 의논하였고(『浮査集』), 8월에 덕천에 남명선생의 사우(祠宇)를 세웠다. 이 때 최영경, 손천우, 유종지, 하응도, 이천경, 이로, 이조, 권세륜, 이광우, 이정(李瀞) 등과 힘을 합쳤다(『桐谷實紀』; 『茅村集』; 『竹閣集』).
1578년(선조 11년) 1월 11일에 경상 감사가, 겁진주(晋州)에서 사는 생원(生員) 하항(河沆, 40세) 등은 학식이 정밀하고 밝으며 조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宣祖實錄』 11년)겂는 계본을 올렸다.
하항(河沆)은 남명선생이 돌아가시자 심상을 입었고, 후에 덕천서원의 원장이 되어서는 일시의 사표가 되었다. 그리고 서원지(書院志)와 산해연원록(山海淵源錄)을 찬술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2년, 11년, 16년.
『宣祖修正實錄』 2년, 16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1·6·15.
河 沆, 『覺齋集』 2권(『韓國文集叢刊』 48), 民族文化推進會, 1990.
河 沆, 『覺齋集』 2권, 서울: 亞細亞文化社,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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