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18. 박제인(朴齊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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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박제인(朴齊仁, 1536∼1618)의 자는 중사(仲思)이고 호는 황암(篁) 또는 정묵재(靜默齋)이며, 본관은 경주(慶州)로 함안(咸安)에 거주하였다. 그는 1536년(중종 31년)에 희삼(希參)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황암집(篁嵒集)』 3권 2책이 전한다.
급문 : 박제인은 24세(1559년)에 남명선생의 문하에 급문하여 수학하였다(『南冥集』, 「編年」 59歲條; 『德川師友淵源錄』, 卷3, 「門人」 朴齊仁).
벼슬 : 박제인은 59세(1594년)에 태릉참봉에 임명되고, 이어 왕자의 사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64세(1599년)에는 송라찰방(松羅察訪)이 되었고, 70세(1605년)에는 4월 16일에 형조 정랑에 제수되었고(『선조실록』 38년), 곧 군위현감으로 외직을 맡게 되었다. 3년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제용감 판관으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있다가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교유 : 박제인은 24세(1559년)에 그 형인 박제현(朴齊賢)과 더불어 난형난제라는 평을 들었고,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최영경, 하원, 김면, 조종도 등과 교유하였다.
의병활동 : 박제인은 57세(1592년) 4월에 왜란이 일어나자 이정(李瀞), 김면, 곽재우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칭 등과 더불어 함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茅村集』).
저술 : 그는 52세(1587년)에 정구(鄭逑), 이칭 등과 더불어 『함주지(咸州誌)』를 편수하였다(『茅村集』).
문인신원과 관련하여 박제인은 55세(1590년) 7월 11일에 이로, 오장(吳長), 하응도, 이대기, 하혼, 문위(文緯), 이정(李瀞) 등과 더불어 합천에서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된 최영경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는데(『茅村集』), 이 때 문경호(文景虎)가 소두(疏首)가 되었다(『濯溪集』).
향사 : 그는 1618년(광해군 10년)에 세상을 떠난 후 함안 도림서원(道林書院)에 제향되었다가 이후 평천서원(平川書院)으로 옮겨졌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38년, 40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朴齊仁, 『篁嵒集』 3권 2책.
李 瀞, 『茅村集』 5권 1책.
全致遠, 『濯溪集』 3권(이조중기사상총서), 서울: 아세아문화사, 1982.
『民族文化大百科辭典』 6·9·25.
韓相奎, 「篁嵒 朴齊仁의 선비 精神」, 『南冥學硏究』 3,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3.
박제인(朴齊仁, 1536∼1618)의 자는 중사(仲思)이고 호는 황암(篁) 또는 정묵재(靜默齋)이며, 본관은 경주(慶州)로 함안(咸安)에 거주하였다. 그는 1536년(중종 31년)에 희삼(希參)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황암집(篁嵒集)』 3권 2책이 전한다.
급문 : 박제인은 24세(1559년)에 남명선생의 문하에 급문하여 수학하였다(『南冥集』, 「編年」 59歲條; 『德川師友淵源錄』, 卷3, 「門人」 朴齊仁).
벼슬 : 박제인은 59세(1594년)에 태릉참봉에 임명되고, 이어 왕자의 사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64세(1599년)에는 송라찰방(松羅察訪)이 되었고, 70세(1605년)에는 4월 16일에 형조 정랑에 제수되었고(『선조실록』 38년), 곧 군위현감으로 외직을 맡게 되었다. 3년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제용감 판관으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있다가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교유 : 박제인은 24세(1559년)에 그 형인 박제현(朴齊賢)과 더불어 난형난제라는 평을 들었고,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최영경, 하원, 김면, 조종도 등과 교유하였다.
의병활동 : 박제인은 57세(1592년) 4월에 왜란이 일어나자 이정(李瀞), 김면, 곽재우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칭 등과 더불어 함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茅村集』).
저술 : 그는 52세(1587년)에 정구(鄭逑), 이칭 등과 더불어 『함주지(咸州誌)』를 편수하였다(『茅村集』).
문인신원과 관련하여 박제인은 55세(1590년) 7월 11일에 이로, 오장(吳長), 하응도, 이대기, 하혼, 문위(文緯), 이정(李瀞) 등과 더불어 합천에서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된 최영경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는데(『茅村集』), 이 때 문경호(文景虎)가 소두(疏首)가 되었다(『濯溪集』).
향사 : 그는 1618년(광해군 10년)에 세상을 떠난 후 함안 도림서원(道林書院)에 제향되었다가 이후 평천서원(平川書院)으로 옮겨졌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38년, 40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朴齊仁, 『篁嵒集』 3권 2책.
李 瀞, 『茅村集』 5권 1책.
全致遠, 『濯溪集』 3권(이조중기사상총서), 서울: 아세아문화사, 1982.
『民族文化大百科辭典』 6·9·25.
韓相奎, 「篁嵒 朴齊仁의 선비 精神」, 『南冥學硏究』 3,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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