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22. 구변(具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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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구변(具忭, 1529~?)의 자는 시중(時中)이고, 본관은 능천(綾川)으로 경성(京城)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9년(중종 24년)에 아버지 정랑(正郞) 수복(壽福)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후에 작은 아버지인 군수 수연(壽延)의 양자로 입양되어 후사가 되었다.
과거 및 벼슬 : 구변은 24세(1552년) 명종 7년에 식년 진사에 3등으로 합격하였고(『司馬榜目』), 30세 때(155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봉사시정(奉事寺正), 한원전랑(翰苑銓郞)을 거쳐 승문원 권지(承文院權知)가 되었다. 38세(1566년)에 남명선생이 명종의 부름으로 상경하자 많은 선비들이 모였는데, 이 때 찾아 뵙고 성심으로 존모하였다. 39세(1567년) 1월 9일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明宗實錄』 22년).
40세(1568년)에는 이조좌랑으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뒤 다시 정언, 수찬 등을 거쳤다. 41세(1569년)에는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기대승(奇大升), 박순 등이 당여(黨與)였기 때문에, 그의 인물됨이 청요직에는 맞지 않는다는 김개(金鎧)의 상소에 의해 체직당하였다. 그 뒤 진주목사로 나가서 최영경 등과 함께 덕천서원의 창건에 공을 세워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는 후일 남명선생의 묘문(墓文)을 지었다.
□ 참고자료
『明宗實錄』 14년, 22년.
『宣祖實錄』.
『東儒師友錄』.
『眉巖日記草』.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3.
『綾城具氏都元帥公派諱得謙家譜』, 1989년.
구변(具忭, 1529~?)의 자는 시중(時中)이고, 본관은 능천(綾川)으로 경성(京城)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9년(중종 24년)에 아버지 정랑(正郞) 수복(壽福)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후에 작은 아버지인 군수 수연(壽延)의 양자로 입양되어 후사가 되었다.
과거 및 벼슬 : 구변은 24세(1552년) 명종 7년에 식년 진사에 3등으로 합격하였고(『司馬榜目』), 30세 때(155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봉사시정(奉事寺正), 한원전랑(翰苑銓郞)을 거쳐 승문원 권지(承文院權知)가 되었다. 38세(1566년)에 남명선생이 명종의 부름으로 상경하자 많은 선비들이 모였는데, 이 때 찾아 뵙고 성심으로 존모하였다. 39세(1567년) 1월 9일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明宗實錄』 22년).
40세(1568년)에는 이조좌랑으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뒤 다시 정언, 수찬 등을 거쳤다. 41세(1569년)에는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기대승(奇大升), 박순 등이 당여(黨與)였기 때문에, 그의 인물됨이 청요직에는 맞지 않는다는 김개(金鎧)의 상소에 의해 체직당하였다. 그 뒤 진주목사로 나가서 최영경 등과 함께 덕천서원의 창건에 공을 세워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는 후일 남명선생의 묘문(墓文)을 지었다.
□ 참고자료
『明宗實錄』 14년, 22년.
『宣祖實錄』.
『東儒師友錄』.
『眉巖日記草』.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3.
『綾城具氏都元帥公派諱得謙家譜』,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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