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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문인 2. 배삼익(裵三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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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364회 작성일 03-11-04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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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배삼익(裵三益, 1534~1588)의 자는 여우(汝友)이고 호는 임연재(臨淵齋)이며, 본관은 흥해(興海)로 안동(安東)에 거주하였다. 그는 1534년(중종 29년) 8월 3일 외조부 집에서 아버지 충좌위부사과(忠佐衛副司果) 천석(天錫)과 어머니 영일(迎日) 정(鄭)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가 남긴 문집은 『임연재선생문집(臨淵齋先生文集)』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그는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학업에 열중하여 절조를 지킬 수 있었다. 퇴계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여 『심경』과 『시전』을 전수받았다.
과거 및 벼슬 : 그는 25세(1558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64년(명종 19년)에는 식년문과에 별과로 급제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한 후 생원, 성균관 학유, 학록, 학정, 박사를 거쳐 호조좌랑이 되었다. 1575년(선조 8년)에 성균관 전적, 형조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 외직인 풍기군수와 양양부사를 지냈다. 1583년(선조 16년)에 사헌부 장령, 성균관 사예를 지냈고, 1587년(선조 20년)에 진사사(陳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다음해 황해도에 흉년이 들자,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해도 관찰사로 나아가 구황에 힘쓰다 병이 깊어 사직하고 돌아오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대성(臺省)에 있으면서 같은 성씨끼리의 혼인을 금할 것을 주청하여 조정에서 한 때 찬반론이 격렬하였으며, 황해도 관찰사 시절에는 병든 몸을 위하여 올리는 쇠고기를 금육(禁肉)이라 하여 끝내 사양하는 강직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외직에 있으면서 특히 석채(釋菜) 등의 사사(祠事)에 정성을 기울여 그가 지내는 기우제에는 효험이 곧잘 나타났었다.
그는 퇴계선생의 문인이기도 하며 장서가로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겼으며, 필법이 힘찼다. 남명선생의 간찰(簡札)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한다.

여우시사(汝友侍史). 배정자교위(裵正字校衛)께 삼가 사례합니다. 매양 한 번 이별함이 길이 봄 회포와 같습니다. 정히 십년을 서로 이끌어주어 오래 되면 될 수록 더욱 깊어진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머물고 침체되는 것을 그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도를 배우는 일이겠습니까? 홀로 스스로 탄식합니다. 지금 계응(啓應)을 만나 이야기는 그치지 않고, 저물녁에는 다시 편지를 받게 되었는데 강(江)의 고기를 같이 부쳐주셨군요. 계응이 공에게 들은 것이 있으니 공은 일마다 주는 것이 강의 고기뿐만 아니라 대단히 많이 준다고 하는데 어찌 주는 것을 넘치게 하겠습니가? 염소(熖焇) 또한 너무 많습니다. 장차 주머니에 넣어두는 것은 완급의 일을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후에는 소식 또한 끊기고 노부의 존망은 날을 알 수 없으니 다만 비통하고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존조께 삼가 사례합니다. 등불 아래 마주한 객에게 바쁘게 써서 드리니 두렵습니다. 12월 26일 건중(楗仲).

그는 1588년(선조 21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해 10월에 부의 북쪽 내성현(內城縣) 호애산(虎崖山) 참판공의 묘 뒤쪽 진(震)좌의 언덕에 받들어 장사를 지냈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裵三益, 『臨淵齋先生文集』.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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