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정岳陽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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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정자.
개설
악양정(岳陽亭)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이 1 8년간 은거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정여창은 1490년(성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 안음현감(安陰縣監) 등을 지내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鍾城)에 유배되었으며, 1504년(연산군 10)에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1517년(중종 12) 우의정에 추증되고, 1575년(선조 8) 문헌공(文獻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악양정이 있는 덕은사(德隱祠)에는 주희(朱熹)[1130~1200],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 정여창,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 돈재(遯齋) 정여해(鄭汝諧) 등 5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15일 석채례(釋菜禮)를 행한다. 석채례가 끝나면 악양정 대청에 모여 『소학(小學)』을 읽는다.
위치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있는 덕은사 경내에 위치한다.
변천
악양정은 조선 전기 정여창이 건립하여 강학하였다. 무오사화 이후 관리되지 못하다가 1899년(고종 36) 3월 향내 유림의 발의에 의해 군의 지원과 후손들의 참여로 1901년(고종 38)에 3칸의 정각을 중건하였다. 1920년에 다시 4칸으로 중수하였다. 「악양정 중건기(岳陽亭重建記)」는 조선 말의 대학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찬하였으며, 「악양정 중수기(岳陽亭重修記)」는 이수안(李壽安)이 찬하였다. 1994~1995년에 악양정을 비롯한 주변 일대를 대대적으로 보수·정비하였다.
형태
악양정과 덕은사는 서원의 일반적인 배치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보인다. 외삼문을 지나 협문을 통과하면 오른쪽으로 관리사무소와 창고 겸 화장실이 있고, 왼쪽으로 가면 악양정이 있다. 악양정에서 사당인 덕은사로 통하는 문이 있고, 문을 지나면 덕은사가 있다. 악양정은 정면 4칸, 측면 2.5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2칸이 대청이며, 양쪽으로 1칸씩 방을 두었다. 가구는 5량 구조이다. 대청에서 출입하는 각 방의 문은 우측방[동쪽] 3짝 분합문, 좌측방[서쪽] 4짝 분합문이다. 중앙에 이자살 불발기창을 두고 다시 후면에 외여닫이문을 두어 치장하였다.
악양정의 좌측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대문채 좌측으로 기이한 형태의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또한 경내에는 매화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악양정 현판은 고종 때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한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의 글씨이다.
현황
2011년 현재 악양정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악양정 유계(儒契)이다. 1995년 5월 2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0호로 지정되었다. 악양정 유계는 도유사(都有司) 약간 명과 강장(講長)[당장] 1명, 직월(直月)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악양정은 정여창이 머물면서 성리학과 오경(五經)을 연구하던 역사적인 곳이다. 조선 전기의 문인인 유호인(兪好仁)이 「악양정(岳陽亭)」을, 조선 말의 학자 송병순(宋秉珣)이 「악양정 근차일두선생운(岳陽亭謹次一蠹先生韻)」이라는 시를 남기고 있는 등 악양을 찾는 수많은 유학자들이 악양정과 관련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정여창 당대의 것이 아니라 1901년 중건된 것이지만, 정여창 및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지라 하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악양정 [岳陽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정자.
개설
악양정(岳陽亭)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이 1 8년간 은거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정여창은 1490년(성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 안음현감(安陰縣監) 등을 지내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鍾城)에 유배되었으며, 1504년(연산군 10)에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1517년(중종 12) 우의정에 추증되고, 1575년(선조 8) 문헌공(文獻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악양정이 있는 덕은사(德隱祠)에는 주희(朱熹)[1130~1200],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 정여창,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 돈재(遯齋) 정여해(鄭汝諧) 등 5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15일 석채례(釋菜禮)를 행한다. 석채례가 끝나면 악양정 대청에 모여 『소학(小學)』을 읽는다.
위치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있는 덕은사 경내에 위치한다.
변천
악양정은 조선 전기 정여창이 건립하여 강학하였다. 무오사화 이후 관리되지 못하다가 1899년(고종 36) 3월 향내 유림의 발의에 의해 군의 지원과 후손들의 참여로 1901년(고종 38)에 3칸의 정각을 중건하였다. 1920년에 다시 4칸으로 중수하였다. 「악양정 중건기(岳陽亭重建記)」는 조선 말의 대학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찬하였으며, 「악양정 중수기(岳陽亭重修記)」는 이수안(李壽安)이 찬하였다. 1994~1995년에 악양정을 비롯한 주변 일대를 대대적으로 보수·정비하였다.
형태
악양정과 덕은사는 서원의 일반적인 배치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보인다. 외삼문을 지나 협문을 통과하면 오른쪽으로 관리사무소와 창고 겸 화장실이 있고, 왼쪽으로 가면 악양정이 있다. 악양정에서 사당인 덕은사로 통하는 문이 있고, 문을 지나면 덕은사가 있다. 악양정은 정면 4칸, 측면 2.5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2칸이 대청이며, 양쪽으로 1칸씩 방을 두었다. 가구는 5량 구조이다. 대청에서 출입하는 각 방의 문은 우측방[동쪽] 3짝 분합문, 좌측방[서쪽] 4짝 분합문이다. 중앙에 이자살 불발기창을 두고 다시 후면에 외여닫이문을 두어 치장하였다.
악양정의 좌측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대문채 좌측으로 기이한 형태의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또한 경내에는 매화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악양정 현판은 고종 때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한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의 글씨이다.
현황
2011년 현재 악양정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악양정 유계(儒契)이다. 1995년 5월 2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0호로 지정되었다. 악양정 유계는 도유사(都有司) 약간 명과 강장(講長)[당장] 1명, 직월(直月)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악양정은 정여창이 머물면서 성리학과 오경(五經)을 연구하던 역사적인 곳이다. 조선 전기의 문인인 유호인(兪好仁)이 「악양정(岳陽亭)」을, 조선 말의 학자 송병순(宋秉珣)이 「악양정 근차일두선생운(岳陽亭謹次一蠹先生韻)」이라는 시를 남기고 있는 등 악양을 찾는 수많은 유학자들이 악양정과 관련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정여창 당대의 것이 아니라 1901년 중건된 것이지만, 정여창 및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지라 하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악양정 [岳陽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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